연극이 일어나는 장소

Standard

뛰어난 장소를 선택할 수만 있다면, 이미 연극 작품을 다 쓴 것이나 마찬가지라 말할 수 있다. 단, 쓰기 전에 앞서 몇가지 원칙이 있다. 예를 들어서 일상 회화에서는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정보에 대해서는 일부로 말하지 않는다’라는 대원칙이 있다. 따라서, 아이가 “아빠, 지금 무슨 일을 하시죠?” 라고 묻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극작가가 관객에게 전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정보를 일반 회화를 통해 전달할 수 없으며 사적인 공간에서 이뤄지는 대화는 좀처럼 진행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도로나 광장이란 공공의 공간은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것뿐이기 때문에 회화 자체가 성립되기 어려워진다. 두 연인이 영화 극장 안에서 친밀한 얘기하는 경우가 좀처럼 없다.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무대란 사적이면서 공적인 즉, 두 공간이 절충된 공간 – 반공반사- 일 필요가 있다.  즉, 외부 사람들이 자유롭게 출입하면서 내부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열어야 한다.

현재 “암실 속의 대화”는 암실과 거실, 2개의 공간으로 이뤄진다. 아직도 처음으로 암실에 들어갔을 때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나는 대학 입학을 일찍이 결정 지어둔 상태라 남들 한창 고3 공부할 때 스페인어 초급, 사진 같은 ‘널널한’ 수업을 듣던 때였다. 처음 암실에 들어설 때 풍겨오는 고약한 화학약품 냄새에 ‘내가 남들 공부할 때 처놀면서 암거나 들쑤시고 다니니까 이 곳에서 벌을 받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랬을 뿐, 나중에는 몇시간이고 암실에서 일할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나만의 공간 안에서 시간조차 잊고 일할 수 있던 것이 너무 좋았다. 하루는 세상의 빛과 차단되어 차분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던 기억도 난다.

암실에 들어가면 사진 현상하는데까지 걸리는 시간동안 (준비 다 해놓은 상태에서 현상하기까지 약 10-15분정도 걸린다 ) 암실은 나만의 공간이다. 대부분 혼자 작업하기 때문에 암실 안에서 대화가 전혀 이뤄지지 않지만, 내 머리속은 어느 때보다 대화로 가득하다. 그 안에서 나는 끊임없이 내 사진(recollection)과 내가 만들어내는 기억(remembrance)과 대화를 나누곤 했다. 부분적으로 익숙한 상대끼리 대화를 나눌 경우 마치 twitter처럼 별 내용 없는 대화를 나누기도 하며, 인도적 사진을 찍기 위해 인도에 간 사진작가 마냥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거창한 대화를 나누기도 하면서 “아- 좀 더 다른 각도로 잡았아야 할텐데…” 후회하기도 한다.

실로 다이나믹한 공간이였다.

Lady Chatterley’s Lover and my writing

Standard

오랜만에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다시 읽고 있다. 채털리 부인하면 일부는 낯뜨거운 정사씬을 떠올리겠지만 실로 내가 손꼽는 최고의 反전쟁 소설 중 하나이다. 내가 매우 동감하는 Doris Lessing의 서문을 요약하자면: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세계 1차 대전을 간접 경험한 작가, D.H. Lawrence는 인간이 서로에게 하는 폭력에 역겨움을 느꼈다. 그는 전쟁과 산업화로 인하여 파괴되고 무능력해진 남성을 동정하고 슬퍼했다. D.H. Lawrence는 결핵으로 인해 성불구자가 된 자신과 조국을 참전 후 반신불구가 된 Clifford 에게 투영한다.  (결핵은 D.H. Lawrence에게 두가지 모순된 상흔을 남겼는데 하나는 성적 욕구 충만한 정신과 성불구인 육체였다) 그리고 소설을 통해서 영국, 인류에게 외친다 – 원시로 돌아가자! 남녀간의 조화, 사랑, 섹스가 계절과 같은 거대한 생명의 주기 – circle of life -가 돌고 돌던 원시로 돌아가자! 봄에는 풋풋한 꽃과 향이 가지런히 풍기고 여름에는 울창한 숲처럼 생명의 기운을 잔뜩 머금은 채 즐기고 가을에는 묵직하리 잘 익은 열매 맺고 겨울은 꽃잎을 떨군채 봄 기다리며 꿈틀거리는 자연 모습 그대로 남녀의 섹스가 닮아가기 애타게 원한다. 이 것이 진정한 남녀간의 화합이고 사랑이고 섹스다. 계절 없는 차갑고 기계적 전쟁과 산업화는 이 모든 것을 파괴하며 삶의 정수를 앗아갔다.

“Connie went slowly home to Wragby. “Home!” It was a warm word to use for that great weary warren. But then it was a word that had had its day. It was, somehow, cancelled. All the great words, it seemed to Connie, were cancelled for her generation: love, joy, happiness, home, mother, father, husband, all these great dynamic words were half-dead now, and dying from day to day. Home was a place you lived in, love was a thing you didn’t fool yourself about, joy was a word you applied to a good Charleston, happiness was a term of hypocrisy you used out of cant, to bluff other people, a father was an individual who enjoyed his own existence, a huband was a man you lived with and kept going, in spirits. As for sex, the last of the great words, it was just a cocktail term for an excitement that buked you up for a while, then left you more raggy than ever. Frayed! It was as if the very material you were made of was cheap stuff, and was fraying out to nothing.

(A Propos of “Lady Chatterley’s Lover”, 62:7-21)

여기서 잠시 책을 내려놓고 – what of now? 21세기는 작가가 갈망하던 tender-hearted fuckin’를 “함 대줘” 같은 차갑고 무감각적 섹스로 대치해버렸고 전쟁 대신 민주주의 곧 무관심이 사회를 덮쳤다.  체게바라는 관광상품용 티셔츠 도안이 되버렸고 혁명은 낭만주의적 곱씹음질이 되버렸다. 이런 핵겨울 속에서 어떻게 나는 그녀와 서로 뜨겁게 부둥켜 안고 이 곳 이 시간에 당당히 서있었노라 외칠 수 있을까? 그 것은 생명과 영원 두개의 기둥 위로 지어진 지붕 밑의 사랑이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