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s wrong with using passive vo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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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작할 때 선생님들이 즐겨(?)주는 조언이 수동태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수동태를 쓰지 말라는 조언의 기록된 시초를 찾아본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George Orwell일 것이다. George Orwell은 Politics and the English Language 에 세이를 통하여 독자들에게 거짓된 정치인들의 허황된 표현을 꿰뚫어 진실을 마주볼 것을 강권했다. 흔히 수동태는 대상이 모호하며 길고 어려운 전문 용어들을 더덕 더덕 붙이기 쉽기 때문에 언어적 위장이라 지적한다. 에세이 이후, 수동태 사용은 금기시 되었다. 그리고 과잉은 늘 문제를 발생하듯이 진실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서 수동태를 피하라는 Orwell의 진정 어린 권유가 어느덧 수동태 무엇인지 그리고 그 역할이 무엇인지조차 망각하게 되는 고등 문맹 후손을 낳는다.

“For every tree is known by his own fruit. For of thorns men do not gather figs, nor of a bramble bush gather they grapes.” Luke 6:44 (King James Version)

성 경에 의하면 열매(행위)로 나무(사람)를 알아볼 수 있는데 “You or anyone shall know the tree by its fruits,” 라고 말하지 않고 대신 “the tree shall be known by its fruits”라 한다. 즉, “내가 다른 나무를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 개인이 한 개인에게 의심을 품고 심문하는 상황을 피하고 “내가 나무라면 내가 맺는 열매를 통해서 (누군가) 나를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라는 결과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자아발견으로 삶을 가득히 메꾸라고 권유한다. 열매를 알아볼 이 누군가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없지만 인간이라기보다 신일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누가복음 6장 44절을 능동적/수동적으로 해석하냐에 따라서 Spanish inquisition와 같은 억압적 사회 구조 혹은 자아를 돌보며 자발적 선행을 권유하는 사회구조의 청사진이 그려진다고 말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결론적으로 능동태 전달하기 부적절한 표현을 수동태는 훌륭하게 묘사할 수 있으므로 “수동태 = 정치적 표현, 언어적 위장” 식의 매도는 위험하다. 세상에 금지시 되어야할 표현이란 없다. 단지 표현이 저자의 의도가 정확히 전달하느냐 여부에 따라서 좋은 표현 나쁜 표현이 갈린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혹은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고드는 집요함이 더욱 요구되는 것 같다.

한 문장을 놓고 늦은 밤까지 열띤 토론을 할 수 있는 날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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