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ng] 브로콜리 너마저 – 앵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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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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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떠나 수도원에 잠시 적을 둔 (소설 적과 흑의 주인공) Julien Sorel가 유창하게 Horace를 인용하면서 수도원장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장면을 기억하는가? 연인에게 너무 고민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자 (=오늘 밤 나랑 질펀하게 놀자)며 써먹는 Carpe Diem – Seize the day, 오늘을 즐겨라 – 남긴 사람이 아이러니컬하게도 로마 시인 Horace이다. 이 것이 시대와 지위를 뛰어 넘나드는 인용의 매력이다.

작가 Proust는 되도록 많은 말을 인용하라고 충고했으며 간결한 문체로 손꼽히는 Lincoln 대통령은 늘 성경을 인용하며 그 안에서 지혜의 말씀을 구했다. 성경 말씀과 좋아하는 작가의 문장을 가까이 지니는 것은 두툼한 지갑보다 마음을 든든하게 해준다. 장미가 양배추보다 향이 좋다며 장미로 수프 만들면 더 맛있을 것이라 결론 짓는 이상주의자 같이 생각의 늪에 동떨어진 세상에서 허우적 거리지 않도록 해준다.

5: Trust in the LORD with all thine heart; and lean not unto thine own understanding.
6: In all thy ways acknowledge him, and he shall direct thy paths.

Proverb 3:5~6, King James

안타까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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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 비방하지 않기 – 설사 그 사람이 부도덕한 정치가, 살인범일지라도 죄를 미워할지라도 죄인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 올해 나의 목표이다. 우리의 눈과 손가락은 흉악범과 부도덕한 자들을 지켜보고 손가락질하기 위해서 사용될 것이 아니라 약자와 아픈 자들에게 따스한 눈길을 돌리고 손길을 내밀기 위한 것이다. Amazing Grace 작사작곡한 John Newton과 연관되어 잘 알려진 William Wilberforce는 그의 믿음에 의거하여 정치가로서 두가지 목표를 세웠다: 1) 노예 제도 폐지와 2) 영국 제국의 도덕성 회복. 노예 제도는 영국 제국 팽창의 원동력이였기 때문에 좀처럼 호응을 얻을 수 없었으나 26년간 줄창 싸운 끝에 세상을 뜨기 3일 전에 폐지되는 것을 직접 보게 되는 쾌거를 이룬다.

지난 몇년간 정부, 주가 조작하는 재벌3세들과 금융 사기범들, 흉악범들의 악행에 몸서리치던 날들을 잠시 잊어버려보자. 가혹한 현실에 낙담한 나머지 자살하는 사람을 “나약한 새끼 – 어차피 도태될 유전자였던 것이지,” 치부하고 다음 기사 클릭 클릭하기보다 혹시나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는데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둘러보자. 너나 나와 마찬가지로 객체로서 사랑과 관심을 받아야 할 사람들 – 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독 이들을 뽑은 이유는 제껴두자.

우선 나는 어린 미혼모들 이 점점 설 곳이 없다는 점이 무척 가슴 아프다. 너무나도 남의 도움이 절실한 그 나이, 그 건강 상태에 놓인 여린 아이들이 부모님, 선생님, 심지어 주변 친구들에게 낙인이 찍혀 가출과 자퇴를 하게끔 강요 받고 있다. 아이를 갖게 되는 상황에 – 섹스- 대해서 수도 없이 듣고 보고 경험한다. 두 남녀가 진실로 사랑하거나 순간적 감정에 휩싸여 판단력이 흐려져서 실수하던 간에 지금 이시간에도 수백명 수천명의 잠재적 미혼모가 될 수 있는 상황임을 부인할 수 없으니 제발 그들이 더럽다, 부도덕하다는 둥의 눈빛은 위선이다. 우리가 10명 죽였다는 연쇄 살인범 용의자에게 핏줄 올리고 헐뜯으면서 (추정) 연간 34만명을 죽이는 낙태를 강요하는 사회적 눈과 편견에 대해서 관대하다는 것은 더 큰 위선이자 모순이다. 낙태의 찬반 토론에 앞서서 낙태하지 않아도 정상적으로 아이를 키우고 정신적 문화적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살 수 있는 사회가 조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람이 살아가면서 내린 선택 – 미혼모, 대학 낙방, 이혼, 사업 파산 -으로 인하여 어떠한 불행한 결과가 일어나더라도 이로부터 박차고 나올 구원의 손길을 뿌리치는 사회가 되어서 안된다. 창조와 혁신을 강조하는 사회가 아닌 사랑과 인애의 공동체, 정죄와 죽음의 사회가 아닌 용서와 구원의 공동체를 바라고 실천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들을 쫓아내는 학교의 입장이 이해 안되는 것은 아니다. 요즘 사회에서 숭배하는 – 하지만 옳지 못한 – ‘고객/사용자 원하는 것을 해줘라’에 따르면 미혼모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옳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암암, 학부모들이 가만히 있을리 없지. “자꾸 이러면 안되는 것을 알지만 마음이 그런 것을 어떡해요?” 라 말하는 학부모에게 “네, xx 어머님 안되는 것 알면 그러시지 마셔야죠.” 라고 딱 끊어서 말할 수 있는 깡 있는 선생님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런 아이들에게 검정고시 혹은 기타 방법을 통해서 고등학교 과정까지 대학교 그 이후까지 온전하게 갈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나는 명문대 들어가고 박사학위/최고 경영자가 되어 GNP 2만불의 선진국 한국 만들겠다는 엘리트들보다 이러한 아이들에 대하여 더 큰 기대와 간절한 꿈을 갖고 있어. 사회적으로 저출산이 진심으로 우려된다면 신혼 가정으로 하여금 억지로 애 낳게 해서 200만원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할 것이 아니라 이미 애들을 낳고 있는/낳게 될 미혼모들에게 좀 더 사랑을 쏟아주는 것이 좀 더 현실적 방안 아닐까?

노숙자에게 필요한 것은 따스한 국물과 빵과 바람 안드는 안식처이기도 하지만 인문학이라는 생각, 혹시 해보지 않았나? 목적지를 향해서 가는 배를 ‘항해’한다고 부르며 목적지를 잃고 방황하는 배를 ‘표류’한다. 항해에 앞서서 자신의 위치와 확실하게 알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도록 갖춰야할 것이 나침반, 지도와 항해학적 지식이라면 인간의 위치와 목적지를 가르치는 것은 인문학이다는 것이 클레멘트 코스의 철학이다 – 나는 여기에 신앙을 덧붙이고 싶다. 클레멘트 코스는 노숙자들에게 철학, 문학, 역사, 예술 등 인문학의 여러 분야에 걸쳐 강의를 제공한다. 임영인 신부님과 기타 여러분의 노력으로 우리나라 성 프랜시스 대학에서도 비슷한 과정이 개설되었다. 무하마드 유누스의 마이크로 뱅킹 사례를 보더라도 그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물론 자본이 필요하지만 큰 그림으로 볼 때는) empowerment이다. Empowerment라는 단어를 영한사전으로 찾아보니 ‘권리를 부여하다’인데 그러한 법 냄새나는 사전적 의미보다 사회적/정치적/신앙적 힘 – power – 을 실어주는 것에 가깝다. Empowerment는 자아를 존중하게 되는 긍정적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밥 세끼 먹듯이 우리의 정신과 영혼 또한 양식을 요구하는데 이 것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 일년에 책 한권 읽는다든지 일주일에 한번 교회가서 예배 1시간동안 의자만 따듯하게 뎁히고 돌아오는 – 영과 육신이 괴리되는 현상은 지속될 것이다. 어떤 의미로 노숙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수업 아닐까 싶다.

성매매 단속 -> 효과적이지 못한 재활 -> 성매매 장소/업종 잠시 이동의 쳇바퀴는 멈추지 않고 계속 도는듯 싶다. 집이 오피스텔 즉, 주거지역이 아니다보니 주변에 성행하는 안마방, 성인 술집은 성매매를 우리 삶 깊숙히 침투하는 바람에 일부는 결혼을 합법적 성매매일 뿐이라고 말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무척 마음이 아팠다 – 분명 결혼의 취지는 이런 뜻이 아니였는데 어찌 이지경까지 이르렀을까. 섹스의 아웃소싱은 – 성매매 – 남녀간의 그 특별한 관계, 너무나도 뜨겁고 친밀한 관계를 차디 차게, 불만족하 게끔 만들기 때문에 (한국 봐라, 눈물 난다 ㅠㅠ) 반대한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이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 끝까지 동행할 것이라는 설명으로 성매매를 정당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를 1차원 해결방법으로 성매매 단속과 같은 1차원적 방식으로 수요를 억제하면 필히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의해서) 다시 균형점이 회복될 것이다. 이를 줄이려면 공급 자체를 줄여야 한다 – 즉, 왜 성매매를 시작하며 유지하는 것일까 질문 자체를 대답해야 한다. 일시적 성매매의 근원을 여자가 원해서, 정당한 직업으로서 여성의 성해방 운동으로 해석하는 분들도 꽤 많아지는 추세이지만 많은 자료와 보고서에 의하면 경제적인 이유가 압도적으로 제1 원인이다. 하지만 이쪽 업계 여성들의 8/10이 자살 충동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마치 늪과 같아서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상황은 앞서 미혼모처럼 구원의 손길 내미는데 인색한 사회의 연속임을 알려준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들에게 새로운 삶을 가질 수 있도록 방안이 – 무상 교육/진료/안식처/직업- 절실하다는 것을 통계가 알려준다.

결론적으로 개인은 사회의 최소 단위이자 유일하게 노력할 가치가 있는 객체이다. 선행의 시작과 끝도 개인에서, 작은 공동체에서, 작은 직장터 (서울 이웃 린 치과) 이지 피튀기며 권력의 정점을 쟁취한 후 피라미드 밑단에게 자비로운 마음으로 나눠주겠다는 약속은 현실감이 떨어진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소위 좌파라는 집단이 – 최근 좌파의 신조는 ‘남의 돈 끌어쓰자’인듯 – 허구언 날 재산의 재분배만 외칠 뿐, 약자에게 여전히 손길가지 않는다면 그들 신자유주의와 또한 별 다를바 없다.

한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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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hard Wagner가 예술을 통해 세상을 뒤흔들고 제도로부터 자유로운 사랑, 용기, 영웅을 통해 완성되 가는 인류의 모습을 그렸듯이 이 시대에 만족치 못하는 내가 바라는 인간상, 초인의 조건은 무엇일까? 독일 신화에 기반 두었던 R. Wagner를 비롯하여 F. Nietzche, B. Shaw가 그리던 초인을 여과 없이 적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터 (또는 초인은 국경과 시대마저 초월할까?), 그렇다면 우리나라 환경과 역사에서 ‘걸맞는’ 초인의 모습은 어떠할까? 아니, 사회 중심적인 동양 특성상 초인이라는 개인적 개념이 과연 유효하기나 할까? 요순시대와 같은 이상적 사회를 그려야하지는 않을까?

우연찮게도 우리나라 건국이념이자 교육이념은 홍익인간 – 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 함 – 이다. 이 짧은 말에도 여러가지 인간상이 함축되어있다. 예를 들어서, 널리 이롭기 위해서는 기회주의적 소시민이 설 곳이 없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인본주의적 사상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제물로 삼기 요구했던 사례와 같이 종교적 믿음과 충돌을 일으킬 여지가 있기도 하다. 특히나 한국적 인간상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 한限은 어찌할 것인가? 미국인을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로 개척자 (또는 약탈자) 를 꼽는다면 나는 한국인의 한限을 꼽는다. 고구려 이후로는 항상 강대국 틈 바구니에 끼어 등 터지는 새우 통일신라, 고려, 조선, 일제 식민지 시대, 6.25, 4.19 혁명, 유신정권, 5.18 민주항쟁, IMF 등등 늘상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위태하며 당당해보지 못한 우리나라의 역사는 고난의 연속이였다고 평한다면 조상들이 섭섭해할 수도 있으나 영역 확장과 같은 능동적 파이 늘리기 보다는 좁은 국토 안에서 수동적 점유율 싸움에 좀 더 초점을 맞쳐왔다는 것이 김사실 최트루.

‘빛의 파동과 입자의 이중적 성격을 띄운다’와 같은 모순적 내용을 물리학과 3학년 때 너무나도 쉽게 받아들였던 것이 생각난다. 마치 진도 얼른 빼자고 보채는 남자친구마냥 양자역학 가르치는 교수님의 강요 – 빛의 이중성을 그저 받아들이라는 – 에 미약하게 끌려가기도 했지만 설사 시간이 주워졌더라도 이 모순을 진심으로 어찌 껴안아야할지 몰랐을 것이다. 물리야 책 덮으면 잊을 수 있겠지만, 양쪽 의견이 대립할 때 느끼는 이 감정, 이 고뇌를 어찌할 것인가? 이마저 물리책 싹 덮고 잊어버렸듯이 넘길 것인가? 그 것은 이웃, 국가, 인류에 대한 희망을 잃는 것일테다.

한을 극복해내는 초인의 조건을 찾자.

Update:

아일랜드라는 국가가 한이 많은 나라 중 하나 아닐까 – 이 나라의 예술을 좀 더 알아보자.

원이 엄마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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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이 아버지께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
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 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고,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 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수 없어요.
빨리 당신에게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갖 그 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 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 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