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tected: [생각] sanctuary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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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 어떤 스타일의 연극을 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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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s of Art를 항상 염두에 두라. 선배들이 어떤 식으로 표현했는지 충분히 답사하지 못한 상태에서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선배들의 연극을 더 많이 읽자, 읽어.

1. Turing test 연장선을 떠올려 보자: 투표소 칸막이 휘장을 놓는다. 한칸 Yahweh YHWH 가 있기에 직접 휘장을 열어 제껴보려고 하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구약에서 신의 얼굴을 보면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므로 항상 휘장을 드리웠다). 반면, 한칸에는 투표소 즉, 대중 (mass N)이 존재한다 – 어떠한 대답을 줄까? 그리고 옆 칸에는 부모님 (outdated advice), 그 옆 칸에는 저명한 교수님/… 이 칸막이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이 나옴에 따라 주인공은 행동한다. 어떤 결과가 이뤄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투표 칸막이 뒤에 있지 않고 모든 곳에 나와 함께 계심을 망각하고 새로운 신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2. 과학을 통해서 우리의 욕망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사람의 운명을 사람 손으로 결정하는 첫 계기가 원자폭탄이였는데 인류에게 주어진 새로운 무기를 어떻게 사용하고 통제할지에 대한 이념적 투쟁: Strauss와 Teller의 무절제한 “다다익선” vs. Oppenheimer의 “폭탄은 만들되, 철저하게 통제한다”는 청문회를 통해서 일방적 Strauss의 승리로 이어지고 미국은 곧 끝없는 무기 양산 체제로 돌입한다. 그 결과, 195x년경 미국이 보유하던 300여개의 원자폭탄은 (수년 안에) 7만여개로 증가했다. 나는 대중이 병을 대하는 태도가 폭탄을 대하는 태도와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한다.병을 철저하게 배제함으로서, 돈을 때려넣으면서 해결하려 한다. 오펜하이머는 폭탄은 이미 만들었지만 이를 제어하고 함께 사는 방법을 꾀했다. 병에 대한 치료 또한 우리가 만들었다. 하지만 무절제하게 생산할 수 없다 – 제어하고 병과 같이 공존하는 방법 (실로 암을 지닌채 오래 사는 사람 수가 꽤나 높다) 을 꾀해야 한다.

3. 우리는 북한의 굶주림, 궁핍함을 무시해왔다. 북한의 경우 이는 holocaust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무시해왔으나 이제와서 약 안 준다고 난리다. Do you see the irony here?

[premise] abortion is so wrong, it’s not even wr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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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내용 즉,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는 아이(=노인)가 노인(=아이) 되는 시간의 흐름을 접했을 때 나의 첫 반응은 “어떤 취한 작가가 저런 dopey한 내용을 낸 것이지?”  나중에 확인해본 결과, Scott Fitzgerald가 쓴 소설을 바탕으로 낸 시나리오라고 하니 내 첫 반응은 나름 정확했던 듯 -_-; 하지만 난 황당한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그 이유는 황당하면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거든. Seth Neddermeyer가 Implosion method가 처음 제안했던 순간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하지만 영화는 우리가 시간의 흐름이 아닌, 순간들을 산다고? 사랑의 순간이 엇갈린 안타까움? 쉬크한 현대인 말을 빌리자면 모든 것을 말하려 함으로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은, 그래서 아쉬워서 좋은 영화였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 파울리 말을 빌리자면 – 이렇게 생각해.

This paper is so bad it is not even wrong.

Wolfgang Pauli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것은 혹은 개념을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강력한 무기이다. 낙태와 고려장을 비교했더라면 차라리 뭔가 보여줬을 것 같다. 낙태와 고려장, 둘다 타인에게 부담되므로 한 사람의 시작과 끝을 강제적으로 종료시키는 행위임에 있어서 비슷한 개념인 것 같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투표권이 있는 시민 대신 투표권이 없는 생명을 사장 시켰다는 점이 다를 뿐 정도?  그래서 한 사람의 시작과 끝을 쇠파이프 휘듯이 이어 붙일 수 있다면, 낙태는 곧 고려장이고 고려장은 곧 낙태라는 한 사람의 주장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들어서 낙태 시키는 사람은 자신이 같은 일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안심한 상태”에서 +/-를 따져 내리는 결정인 반면, 고려장은 자신에게 돌아오는 부메랑이 될 수 있음을 충분히 인지한 상태에서 내리는 결정이다. 앞으로 고령화 사회가 진행될 터이니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겠지.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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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ri가 The Art of Dramatic Writing에서 premise-character-conflict (unity of opposites) 이 세가지를 중심으로 연극을 쓰라고 닥달치는 이유는 premise 즉, 작가가 증명하고자 하는 대전제가 뚜렷해야 인물과 투쟁이 대전제를 증명하기 위한 초석으로 적절히 활용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리하여 Egri가 그린 연극 청사진은 마치 오밀조밀한 톱니바퀴 많아서 숙련된 장이만이 만들 수 있는 기계식 시계를 떠올린다. 하지만 Egri와 같은 선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무대에서 총이 등장하면 그 총은 반드시 사용될 것이다” 문구가 Buchner의 연극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Buchner의 “당통의 죽음”은 진지한 역사를 다루면서도 ‘나 여기에 있어’를 외치듯이극의 흐름과 무관한 뚱딴지 인물이 나타나기도 한다. 연극의 흐름이라는 틀 안에서 본다면 매우 혼란스러운 작가인 셈이다.

Shakespeare 이전의 연극 등장 인물은 “Greed”, “Lust”, “Naivete” 와 같이 단어를 의인화 시키는 것이 통상적이였던 반면, Shakespeare는 특정 인물 안에 각종 인간의 약점 세트를 집약시킴으로서 – Othello 안에는 자부심과 질투를, Romeo 안에는 성급함과 순진함을 – 드라마적 요소가 풍부한 씨앗을 심어놓았고 이를 바탕으로 그 어느 누구보다 인간 내면을 깊숙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이에 반해 깊은 신앙심, 방대한 인문학적 독서량, 물고기 신경조직에 대한 발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분석적 머리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일까, Buchner는 Shakespeare보다 한단계 더,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환상과 욕구를 분리한다. 그는 우리 삶에서 낭만, 환상이란 찌꺼기를 과감히 솎아내고 역사 그대로 담고 어디를 향해서 표류하고 있는지에 밝히고자 했다.

극작가란 제가 보기에 역사가와 다를 바 없습니다. 전자가 우리에게 역사를 재구성해 준다는 점과, 메마른 이야기를 전해주는 대신에 우리를 한 시대의 삶 속으로 직접 옮겨 놓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인물 묘사 대신에 인물 그 자체를 보여주고, 기술(記述) 대신에 형상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후자보다는 우위에 서 있다고 하겠습니다. 극작가의 최대의 과업은 사실 그대로의 역사에 가능한 한 가까이 다가가는 일입니다. 그의 책은 역사 자체보다 더 윤리적이어도, 덜 윤리적이어도 안 될 것입니다. 역사란 사랑하는 주 하나님께서 젊은 아낙네들이나 읽으라고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Georg Buchner, 양친에게 보내는 편지 中에서

작품을 통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혹는 역사는 승자의 전유물과 같은 이분법적 역사관에서 – Buchner가 편지에서 말하는 젊은 아낙네들이 읽기 위한 역사를 “역사관-A”이라 부르자 – 벗어나서 있는 그대로를 담아온다. 역사관 – A는 역사가가 나쁜 의도를 가지고 왜곡했다기 보다는 징검다리와 같이 띄엄 띄엄 남겨진 불완전한 증거와 기록 사이를 메꾸기 위해서 비이성적인 인간 머리에서 나온 논리적 추측이 이뤄질 때 필연적으로 뒤따라오는 근본적 짐이자 한계이다. 한국 정부가 일본의 역사왜곡을 비난해왔지만 우리 역사 또한 그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그리고 우리 개개인마저 역사관 – A의 오류를 거듭 범함을 알 수 있다. 변호사가 피고측에게 불리한 자료를 제외한 기타 증거물과 ‘논리’로 재판의 결과를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오고,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고 헤어진 후 어떤 기억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어떤 추한 기억을 버리는지 돌이켜보면 우리 또한 역사관 – A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어쩌면 진화를 통해서, 생존을 위해서 역사관-A 입장을 취하도록 유전적으로 코딩이 되어있는지 모른다. 하나 덧붙이자면 나는 역사관 – A는 미학적 – 사람은 논리적이며, 대칭적이 곧 아름다움이며, 황금비율이 안정적이다 등등 – 관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면, Buchner는 역사관 A를 벗어던진다. 주변 친구들은 Danton에게 Robespierre과 맞서 싸우라고 권유하지만, 그런 싸움조차 뛰어들기를 거부하는 그를 보고 너무 게을러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며 체념해버린다. 다려진 옷만 입고 술도 안 마시는 청렴결백한 Robespierre과 달리, 여자의 허벅지를 탐하고 인간의 추한 욕구를 거스름 없이 드러내는 당통을 보면서 일부는 그를 게으르고 외설적이다, 성경에 충실치 못한 사람이라 생각할 것이다.그래 – 당통의 세계관은 확실히 생존 스킬 측면으로 볼 때 빵점짜리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Buchner가 당통을 통해서 알리고자 하는 것은 한낱 루저인생이 아닌, 삶 그자체였다.

작가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해서는 안 되고 세상이 어떻게 존재해야 할 것인가를 묘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그 사람한테 이렇게 얘기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이 세상이 어떻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다 아시고 이 세상을 만드셨을 텐데, 그런 하나님보다 더 좋은 세상은 만들고 싶지 않노라고 말씀입니다.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에 대해서 말하기보다 사람이란게 그럴 수 있기 때문에 그 모습 자체를 보여주면서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를 우리에게 던져줬다.  하지만, Buchner가 시보다 보수적인 희곡을 통해 깨부순 벽을 실제 우리는 200여년이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전지대 안에서 – 인류 역사상 이토록 과잉보호 받는 세대가 있을까 – 서성일 뿐,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독서가 반복되고, 만남이 반복되고, 역사가 반복된다.

반복; Recollection과 Repetition.

(To be continued)

역사와 형법 제도의 부당함을 당한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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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istory of all hitherto existing society is the history of class struggles.”

-Marx

역사는 승자의 전유물이라 말한다. 간혹 Howard Zinn의 “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처럼 약자, 잊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 역사의 흔적을 찾아내어 밝혀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승자들의 기록이 후세에 전해진다. 우리가 역사를 기록하는 빈도수, 볼완전성을 토대로 연극을 쓴다면 어떻게 될까? 그 사이를 메꾸는 것은 비이성적인 인간에 대한 논리적 추측이다.  연극의 주제는 재판 – 왜? 왜냐면 재판 또한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의 ‘자료’를 근거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판 또한 역사와 비슷하게 ‘승자의 논리’로 쓰여진다. 간혹 예외 사례가 있겠지만, 마치 거대한 톱니바퀴가 돌아가면서 천천히 틀에 큰 예외없이 밑에 깔린 조약돌을 으깬다. 나는 역사 기록 방식을 반대하거나 하지 않는다 – 마치 왜 불확정성 원리라는 제약이 있어야하나 혹은 왜 중력에 의해 우주가 붕괴되야하는가에 대해서 떼 쓰는 것과 마찬가지의 ‘억지부림’이다. 인간이 자연을 거역할 수 있다는 낭만주의적 믿음일 뿐이다. 실험 사실이 말해주며, 우리가 여태까지 남겨온 역사적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따라서,역사의 기록 방식으로 이뤄진 사건을 보고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대처할 것인가?  이 것이 나의 큰 물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