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질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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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치과에서 있던 일: 환자 대기실 자판기 옆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데 어떤 할머니께서 대뜸 내 옆에 있는 어머니께 나 방광염 있는데 뭘 먹으면 잘 먹었다고 소문날까뿌 ‘ㅅ’ 식의 질문을 하셨다. 어머니 왈, 물 드시면 좋을 것 같네요. 나 물은 하도 많이 먹어서 지겨워뿌 ‘ㅅ’ . 그럼 식혜 드시면  좋겠네요. 그러자 할머니께서 대뜸, 아 옛날에는 식혜가 참 맛있었는데… 하면서 능수능란하게 이야기 보따리를 한웅큼 푸시기 시작한다. 동전 꺼내지도 않는 것 보아하니 음료수는 애시당초 안중에도 없었고 당신 말씀 들어줄 상대가 필요하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2시간 가까이 기다리느라 지쳐가고 있었으니 이어폰을 귀에서 뽑고 듣기 엄마와 할머니 대화를 옆에서 엿듣기 시작했다.

몇분이 채 안 지나서 할머니 스펙이 술술 나온다.  벽 건너편 병실에서 5천만원짜리 임플란트 치료 받고 계신 할아버지는 박정희 시절 공무원이셨고 아직까지도 사업하시면서 경제 활동 중이시며 할머니에게는 월 500만원 한도인 카드를 주셨다. 할머니께서 대학을 가고자 했는데 부모님께서 여자가 무슨 서울에서 대학이냐, 집 근처 조선대학교 (호남 출신이신 듯) 가라는 말에 화가 나서 아예 대학교를 가지 않았는데 그게 아직도 후회 되신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영어도 하시고 (영국 액센트와 함께 ) 일본어도 하시고 논어도 줄줄 읊는거 보아컨데 단순히 돈만 많은게 아닌 박식하고 멋진 할머니셨다.

짧은 시간 안에 크고 작은 이야기가 부지런히 오갔다.  맞벌이하는 며느리가 손주를 자신에게 안 맡기고 젊은 가정 주부에게 맡긴 이유가 단지 영국식 영어 발음 << 미국식 영어 발음이라면서 노한 상황이며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님의 대립과 저격 당하셨던 상황을 생생히 묘사해주는 등 정치, 역사, 가정학을 잘 엮어서 풀어내시는 모습을 보아컨데 엄마 옆에 앉았을 때부터 뚜렷한 목적-_-의식 있던  할머니였던 것이였다. 서로 얘기에 바쁘고 140자 트위터에 싸지를지언정남의 얘기는 도통 들어주지 않는 요즘 세상에 모처럼 잡은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고자 하는 단호한 의지가 느껴졌다. 하지만 할머니가 기억에 남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80세 가까운 이 할머니 – 폐경기 지난 것은 물론, 이제는 턱수염도 날법한  – 아니, 한 여자의 질투가 무척 인상적이였기 때문이다.

은퇴 이후 곧 사업을 시작하신 할아버지는 오늘날까지도 딱 한명의 비서를 두었다고 한다. 이제 나이가 40을 넘었는데 여전히 결혼 안했다고 하니 20대 청년인 내가 보기에는 30대 후반에 친 거미줄 이 굳어서 벽이 되지 않았을까 의아할 정도로 관심 밖 대상이건만 당신께서는 무척 신경이 쓰였는지 여비서가 마음에 안드는 점을 하나 둘씩 까발리신다. 예를 들어 월 500만원 카드 비밀번호를 할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절대로 가르쳐 주지 않는데 그 비서는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게 싫으시고 할아버지께서 하루종일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핸폰을 충전하라고 비서에게 건네줄 때 할아버지 체온이 그 여자에게 전해지는게 너무 싫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비서 바꾸라고 계속 말하지만 이런 질투심 느끼고 있음을 직접 말하지 않으니 할아버지가 그 원인을 알 터가 없지. 설마 80 노친네의 미지근하지도 못한 체온이 질투의 원인이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냐고.

문득 여자친구 애태운답시고 바쁜척, 다른 여자들에게서 자꾸 연락 온다 등등의 정보를 흘려 보내던 나의 예전 모습들이 우습고 찌질하게 느껴졌다. 정작 내가 의도한 질투심은 전혀 발동 걸리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너 내가 왜 화났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이에 당황한 나머지 내 죄스러운 의식 중에서 닥치고 떠오르는 것 허공에서 막 끄집어 말하곤 했다. 그럼 그럴수록 그녀는 더더욱 갈피 못잡는 내 행동에 우선 1차적으로 화가 나고, 자신이 미처 알지도 못했던 나의 결함을 발견하니까 더더욱 화를 내니 상황은 악화될 뿐이다. 그냥 입 닥치고 내가 잘못했어 다음부터 잘할게라고 한들, 맨날 그소리냐고 핀잔만 날라온다. 스킨쉽으로 해결하는 것도 상황이 그나마 좋을 때 얘기지, 시도 때도 없이 시도했다가는 몰상식한 짐승 취급 받는다. 그리하여 시간이 지나도 뭘 잘못했는지 깨달지 못하면 말 없이 떠남으로서 남자를 벌준다.  여자의 마음은 오묘하고 깊기에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다. 결국 남자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란 여자가 나를 좋아할 수 있게끔 기회를 열어주는 것이지, 남자가 여자를 고를 수 있다는 착각은 하루 빨리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태초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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