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mise] acting natur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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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잃은 이가 마치 쥐어짜 버려진 레몬처럼 느껴질 때 – 이는 그가 노틀담의 꼽추와 같은 퇴보 유전자이기 때문에 감정이 남아있는것일까? 아님 사랑의 본질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 지적 미숙함으로 인한 오해일까? 둘 중 어떤 시나리오를 생각해봐도 그는 (적어도 사랑에 있어서는) 자연주의자가 될 수 없다.

자연주의의 목적은 지구상에서 번영하는데 있다. 즉, 강한 유전자를 전할 수 있는, 필요 이상의 감정 이입을 범하지 않는, 이성적으로 무결함적인 인간으로서 추구할 수 있는 행복만을 그린다.  만일 Naturalistic Aptitude Test가 있다면 여지없이 3대 안에 도태될 유전자인 것으로 판명날 것이다. August Strindberg의 Miss Julie는 이렇게 도태될, 그래서 삶 자체가 고통으로 가득할 수 밖에 없는 degenrate 인물의 추락을 다뤘다. 허나 Miss Julie는 명예를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귀족가문의 딸이기 때문에 추락을 견디기보다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인 – 마치 일본 무사가 할복하듯이 – 하였다.

그럼 명예가 없는 그는 어떤 입장인지? 자연주의 – 진화론에 의해 도태될 나는 degenerate임이 틀림없지만 (자만할지언정) 명예와 자존심은없기 때문에 Miss Julie처럼 자살을 택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남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자만심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비세속적) 상승을 꿈꾸기 때문에 자연주의적 역할을 연기하게 된다. 그러나 자연주의는 낭만주의, 댄디즘 등등 기타 xx주의와 달리 살을 붙이기 보다 뼈를 드러내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연기할 수 없다. 마치 마른 사람에게 옷을 많이 입혀서 뚱뚱한 사람을 연기하도록 할 수 있겠지만, 뚱뚱한 사람에게 마른 사람을 연기하라고 할 수 없듯이 자연주의는 연기될 수 없다; 자연주의에 철저히 입각하지 않는 이상 그들과 같이 쿨해질 수 없다; 시크하지만 내 여자에게 따스한 도시 남자가 될 수 없다. 그는 연기하기 때문에 – 모든 배우가 대사를 외우고 기억 속에서 고통에 가득한 사람의 표정을 기억해내 얼굴로 끄집어내야하듯이 – 기억에 종속된다. 그리고 그 기억은 필히 그를 배반한다. 기억력 자체가 그리 믿을만한 – 가물가물할 뿐더러 왜곡마저 가능한 – 기억을 통해서 사랑을 기억한다는 것은 시작하기도 전에 “사랑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다음 단계를 밟고 나설 수 밖에 없다. 다음 단계가 다른 사람과의 사랑이 될 수도 있겠지만 (흔히들 이를 택한다) 그럴 수 없다; 다른 사람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그저 대상이 바뀔 뿐, 과정에 있어 반복이고 이는 상승을 꿈꾸는 그로서 택하기 어려운 선택이다. 그보다는 그가 갖고 있는 사랑에 대한 이해와 사랑의 본질을 탐구한다.

어느 순간이 온다: 행운에 의지하여 (행운에는 나로서 주체가 취하는 행동도, 연기도  없다; 애초에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사랑이란 해처럼 그가 직접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햇빛이 비추는 물체들을 봄으로서 해가 있다는 것을 믿을 뿐이다. 그는 보지 못하기 때문에 믿고 그로 인해 보게 된다; 실체를 못봐서 믿음 아래 모든 가능성을 본다. 그리고 행동한다; 남에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할 수 없는 액션을 통해서 불가능이 이뤄질 것으로 믿고 행동한다. 댓가성 액션을 계산하고 취하는 행동은 진화론적 쳇바퀴에 자기 자신을 던져 넣는 꼴일 뿐이다. 어느덧 온갖 배경과 소품이 갖춰진 무대 위의 – 기억력 토대로 이뤄지는 – 연기는 끝나고 조건 없이 황량한 무대 위에서 그 혼자만이 반복하며 영원을 바라보는 사랑만이 남을 뿐.

Beethoven 9th symphony 3rd movement: half lover’s lament, half prayer.

Fast rode the k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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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t rode the knight
With spurs, hot and reeking,
Ever waving an eager sword,
“To save my lady!”
Fast rode the knight,
And leaped from saddle to war.
Men of steel flickered and gleamed
Like riot of silver lights,
And the gold of the knight’s good banner
Still waved on a castle wall.
. . . . .
A horse,
Blowing, staggering, bloody thing,
Forgotten at foot of castle wall.
A horse
Dead at foot of castle wall.

-Stephen Crane

르느와르의 빛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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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서울시립 미술관 르느와르 특별전을 다녀왔다. 워낙 유명한 화가의 유명 작품를 대량 확보한 탓인지 많이들 다녀왔고 많이들 블로그 포스팅한다. 그네, 피아노 앞의 소녀들 등등의 유명한 작품들도 있었고 앤 해서웨이 정말 닮은 앙리오 부인의 초상화 (나중에 찾아보니 나만 닮았다고 생각한게 아니다) 등등 모르는 작품도 많았다.

Anne Hathaway 닮았어

Anne Hathaway 닮았어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작품 2개: 졸리마네의 초상과

행복한 그림만 그린다면서!

그리고 제목 기억 안나는 이 작품

피부 위에서 노니는 빛의 요정

이제 벗은 여자 보려고 미술작품 기웃 기웃하던 나이는 지났고  – 에헴;; – 앞으로 미술 작품 안에서 무엇을 보려고 눈을 치켜 들어야 할까? 클림트전과 르느와르 전에서 내 눈은 여성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두 사람이 어떻게 표현하는지 관찰하느라 좀 바뻤다. 여성에 대한 찬사가 끊이지 않는 르느와르 vs. 역시 여자에 대한 환상이 끊이지 않았다는 클림트 이 두사람이 여성에 대해 품은 환상은 질적으로 다르다.  클림트는 에밀리가 죽을 때까지 사랑하되 다수의 모델과 관계를 맺고 애 갖는둥 좀 복잡한 애정관을 가졌다고 추측 되는 반면, 르느와르는 아내와 가족을 소중히 여기며 여성에 대한 애정을 그림이 하나하나 담아낸… 아 잠깐, 잠깐만! 하녀들에게 알제리 풍 옷도 입혀보고 엉덩이를 지나치게 강조해서 그린 르느와르를 떠올리자니 이녀석도 변태 중 상변태 아냐? 말이 알제리풍 이색적 분위기 연출이지 시쳇말로 하자면 코스프레 놀이한거잖아…

뭐 같잖은 헛소리 집어치고 -_- 성의 성역을 구축하며 평화를 원하고 또 원했던 클림트와 달리, 포근한 느낌으로 감싸며 이미 평화를 찾은듯한 르느와르의 여유가 무척 인상적이였다.  마치 이 사람 주위에는 팅커벨이 맴도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부러웠다, 세상을 그런 눈으로 보도록 최면을 걸 수 있는 그의 정신력이. 최근들어 점점 삐뚫어져가는 나에게 잠시나마 빛을 비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