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여름 지리산 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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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4명과 3박 4일 일정으로 지리산 종주를 계획했다. 일반적으로 2박3일로 마칠 수 있으나 나를 포함한 팀원 전체가 등산은 종종 가지만 1박 이상으로 종주 가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좀 넉넉하게 잡았다.  우선 지리산 지도부터 펼쳐보자.

지리산 종주 코스

우리가 계획한 일정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1. 남부 터미널에서 구례발 버스(22700원)를 타고 4시간 간다. 구례에서 성삼재 거쳐 노고단가는 버스를 타고 노고단에서 하루 묶는다. 한마디로 그냥 날로 먹은 하루.
  2. 노고단에서 화개재 거쳐 연하천 거쳐 벽소령 대피소에서 하루
  3. 벽소령에서 장터목까지 하루
  4. 장터목에서 천왕산 찍고 중산리 내려와서 집으로 고고

3,4를 같이 엮으면 그 것이 바로 2박3일 코스인 셈이고 한발 더 나가서 새벽에 노고단까지 올 차량 방편을 마련하면 지리산 종주 1박2일 코스인 완성 헥헥. 젊은 청년이라면 1박 2일, 길어야 2박 3일 코스를 당연시 여기는 듯 싶다. 노고단, 벽소령, 장터목 등등의 산장 예약은 여기서

하지만 자아 존중감이라곤 1g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는 그럴 계획은 결코 없었을 뿐더러 느긋하게 도착해서 동동주까지 마시고 노고단행 버스를 올라탄다.

취객 등장

어이 취한다 - 취객 버스 올라타다

버스 타고 뒤늦게 알았지만 구례  <-> 노고단 가는 산길이 워낙 험준해서 좀 많이 쏠린다. 산행에 앞서 술 마시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선택이 아니였던 듯. (그걸 겪어봐야 아냐… -_-)

잠깐 지리산에 오게 된 계기를 설명하자면 나랑 정호가 메신저에서

나: 여름에는 좀 운동을 해야겠어. 산도 좀 많이 다니고.

정호: 산 자주 다녀요?

나: 뭐 이런저런데 종종 갔었지. 회사 산악회에도 있고 아빠가 어려서부터 끌고 갔으니까… 아, 지리산은 안 가봤다.

정호: 지리산 어때요? 예전에 종주 플랜 짜놓은 것 있는데

해서 총 5명: 김영하, 김정묵, 여정호, 윤효근, 홍의현이 급조해서 가게 된 여행이다. 의현이와 정묵이는 나와 같은 01학번 1분반이고 정호는 02학번 1분반, 효근이는 02학번 x분반. 의현이랑 같이 여행 가본 적이 없어서 이참에 끌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정묵이는 석사 디펜스 이후 할 일이 없는지 알아서 쫄래 쫄래 따라왔다. 효근이는 나랑 같은 동아리임을 제외하면 01학번 1분반이라는말도 많고 탈도 많은 조직과 엮일 이유가 딱히 없는데 유학가기 전에 추억 만드는 것이 다급했는지 나의 꼬임에 쉽게 넘어왔다. 그동안 효근이랑 형이상학적인 대화만 나눠왔으나 살로 부딪힐 때는 어떤 애인지 궁금했기 때문에 많이 기대됐다.  3일 후면 요즘 잘나간다는 통계학 공부하러 미국 간다.

어쨌든, 40분가량 버스를 타고 올라가서 노고단 입구에서 한컷 찍는다. 왼쪽에서부터:  윤효근, 홍의현, 김정묵, 나, 여정호 이렇게 다섯이다.

멤버 @노고단 입구

멤버 @노고단 입구

그리고는 짐을 끙차- 하고 짊어지고 고된 산행을 시작했다.

IMGP7989

산행 시작

(참고로 사진은 여정호가 찍는 관계로 종종 안 보일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지리산 종주는 여유로운 일정에도 불구하고 실패였는데 그 원인은 크게 세가지로 나뉜다.

첫번째 원인은 우리가 얼마나 먹고 갈아입는지 파악이 안되어 짐을 지나치게 많이 싸서 이동시 체력 소모가 많았고 두번째 원인은등산 루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점이고 세번째이자 가장 결정적인 패인은 2일째에 내가 발목을 접질렀기 때문에 중도 포기하는 수 밖에 없었다 -_-;;

첫번째 원인으로 돌아와서 밑에 사진이 시작한지 1시간이 채 안 지난 상황에서 찍은 사진이다.

아 디다

홍의현- 아 힘들다 ::: 김정묵- 고작 그 것 가지고 훗

의현이는 체력이 무척 좋은 편인데 짐이 무거웠는지 (상의 3벌, 하의 3벌, 윈드브레이커, 우비, 쌀 4kg, 엄청난 양의 간식… 암튼 많았다) 얼마 못가서 어깨가 아프기 시작했고 그 것은 모두 마찬가지.하지만 다행히도 노고단 대피소까지 불과 1시간반 거리였기 때문에 금방 도착했고 휴식.

노고단 대피소 도착

노고단 대피소 도착

얼른 짐을 덜어낼 목적으로 밥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 팀원 중에서 가장 입맛이 발달 된 정묵이가 기분 좋은갑다. 표정이 기대에 가득하다.

기미 푸드

내게 밥을

그래 밥 줄게, 불부터 붙이자.

불 어떻게 붙이지

정묵 - 근데... 불 어떻게 붙이지 ::: 바보주인 - 몰라, 처음임.

가스 버너는 사용해봤는데 휘발유 버너 (빨간 캐니스터 안에 휘발유가 들어있다)는 익숙치 않아서 여러 차례 시행 착오가 있었다. 불 조절이 잘 안되서 나무 테이블 자체가 불 붙기도 하고 (대피소에서 황급히 소화기를;;) 이런 저런 삽질하다가 포기하고 결국 가스만 사용하기로 한다 – < note: 휘발유 가져가지 말고 대피소에서 파는 가스 사서 쓰자>

밥 짓는 의현 각시

밥 뒤섞는 의현 각시

족발도 사오고 이것 저것 먹을게 많아 인당 150g씩 750g 쌀밥 먹을 생각했으나 일단 풍족하게 1kg. 의현이가 1학년 분반 MT 때도 밥 지은 기억이 났는데 (설겆이는 확실한데 밥도 지었나 가물 가물) 오늘도 밥을 짓는구나… 하면서 옛날 생각도 났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는 여전히 포식자-_- 입장을 취하는 꼬라지가 딱 3년전 말년 병장이구나 하면서 슬며시 자기 반성. 고쳐야지, 고쳐야해.

밥상 차려놓은 사진을 올리면 그럴싸할텐데 사실 먹느라 바빠서 사진이 없다.  이런 저런 얘기 오가는 도중 의현이는 지겨웠는지 잠자리랑 놀다가 죽음의 키-_-스를 선사한다. 정호가 어렸을 때 잠자리 찢어본 적 없다는 것에 놀랐다. 힘없는 생물 잔혹하게 죽인게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짖궃은 남자애들 장난하다보면 한번쯤은 해볼 법도 한데 말야.

Kiss of Death

Kiss of Death

어느덧 어둑 어둑해지기 시작했고 내가 좋아하는 핑크 구름이 떠서 서둘러 사진 찍었는데 이게 왠걸,

우리 흑인 형제들

우리 흑인 형제들

그나저나 여행 내내 효근이의 걱정은 행여나 산 타다가 너무 많이 타서 아시아인 뽑은줄 알았는데 흑인이 나타서 대학원 지도 교수가 놀라게 되면 어쩌지였는데 결과적으로 별로 안 탔다. 외모 얘기가 나와서인데 산 타는 도중 우리가 잠시 같이 쉬어가던 어르신께서 “학생들 공부 좀 했나? 생긴게 좀 했을 것 같은데” 말씀하시길래 애써 부인했지만 우리의 샌님 모습은 부인할 수 없는 것 같다. 5명이 하나같이 안경 썼고, 어깨도 좁고, 근육질은 한명도 없고 (도중에 단체로 산행 훈련 나온 고등학교 유도부랑 마주쳤는데 어찌나 우람한지 깨갱;;) 좀 부끄러웠다. 유명 천체 물리학자 허블은 천체 물리학과 프로 복싱계를 두고 고민했었고 (헤비웨이트 챔피언은 따놓은 당상이라는 평 받던 유망주) 불의 전차에 나오는 영국 육상 국가대표들은 케임브릿지 출신의 사회적 엘리트인걸 보아컨데 옛날에 사회 엘리트, 군인은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강인한 존재였던 것 같다.  유클리드에게 기하학을 배운 알렉산더 대왕, 고려사와 세종실록을 편찬한 김종서 장군, 지성인 100에 뽑힌 General Petraeus가 그러하다. 오르면서 효근이 왈, 영화 300에 나오는 Leonidas가 우리를 경멸했겠죠? 반면, 나는 일단 상황에 닥치면 그래도 이 악물고 적응하는 편이니까 그럭저럭 또 살아남았겠지… 하면서 애써 위안하지만, 그럴 수 없어. 물론, 이 논리가 지나치게 발전 되어 스윙 재즈, 큐비즘 등등 20세기 예술을 entartete Kunst (퇴보된 예술)라고 명명하며 철퇴를 가하던 나찌당의 논리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그 것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야.  단지 위급한 상황에서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지켜주고 싶은 사람들을 – 서울대 입구에서 기다리듯이 – 위해 준비하고 싶다. 잠시 삼천포로 빠졌으니 다시 지리산으로 –

산장에서 괴로운 밤을 보내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고단 대피소에서 약 1시간더 올라가서 운해를 보았는데

운해

운해 노고단

내가 아직까지 본 운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운해였다.

네게 보여주고 싶어

저장 꾸욱-

“지리산 동동주도 먹었고 운해 보고 사진 찍었으니 이제 내려가볼까?” 라고 말해놓고 애들 반응이 시큰둥하니 멋쩍어서 씁쓸하게 웃었다.

쩝

물론 이제 겨우 시작이고 앞으로 능선 따라서 약 10km를 쭈욱 가야한다.  고생길 들기 전에 각자 굳게 다짐한 얼굴 한장씩. 표정 보면 진취적 2명, 유희 2명, 그리고 퇴보 1명 -_-

김정묵

함 가볼까 - 김정묵

어이 시원타

어이 시원타 - 홍의현

헤헷

헤헷 - 윤효근

낄낄 나는 셰르파 - 여정호

낄낄 나는 셰르파 - 여정호

두려워, 집에 가면 안될까

집에 가면 안될까 - 김영하

하지만 내 표정과 무관하게 산행은 계속 되어야했고 결국 반야봉, 화개장을 거쳐서 두번째 목적지 벽소령에 도착한다. 사실 반야봉은 계획에도 없던 루트였지만 도중에 마주친 아저씨가 “야, 싸나이면 반야봉 찍고 가야지!” 말에 훅; 해서 홧김에 올랐다. 왕복 2시간 반이였는데 욕 나올정도로 험난한 곳이 숨어있었다. 반야봉 깔아뭉개고 찍으니

반야봉을 깔아앉고

반야봉을 깔아앉고

존나 좋군 한번 따라해보고

존나 좋쿤

존나 좋군

암튼 반야봉 찍고 내려와서 6키로 더 가면 있을 벽소령 대피소로 가고 있었는데 이게 왠걸, 분명 지도상으로는 여유 있는 코스였는데 막상 가보니

누가 쉬운 길이랬어

누가 쉬운 길이랬어 -_-

여기 돌빗면을 짚고 넘어가다가 넘어지면서 오른 발목을 접질렀다. 처음에 넘어질 때는 그냥 살짝 넘어진 줄 알고 일어나려 했는데 이게 왠걸, 제대로 아파오면서 아차 싶었다. 배낭이 무거운 나머지 몸의 균형을 잃고 확 쏠리면서 폴대는 휘었고 접질렀따. 결국 2시간 정도 왼발로 깽깽이 하다시피 해서 벽소령 대피소 도착. 속으로 내일 아침까지 낫으면 했지만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었다. 여러번 다쳐본 오른 발목이였기 때문에 지리산 종주는 이것으로 끝난 것을 예감했다.

내일 내려갈 생각을 하니 저녁 먹으면서 좀 김이 빠졌다. 결국 우리가 싸온 음식 – 김치, 참치, 옆 테이블에서 얻어온 삼겹살, 스팸 2통, 김, 육포, 크림 수프, 쌀 3kg 중 2kg 등등 다 털어서 배불리 먹고

찍지마 이 시키야

의현 - 오늘 밥 탔다! 맛 없다! ::: 영하, 정묵 - 네가 했잖아 -_-+

벽소령 대피소 - 마지막 날

벽소령 대피소 - 마지막 날

사진 몇 방만을 남기고 3일째, 천왕봉을 10여키로 남겨 놓은 벽소령에서 하산해 백무동 매표소 (20600원)에서 버스타고 동서울 버스터미널 도착.

써놓고 보니 상당히 허무하고 anti-climatic하다. 많은 기대로 부풀었으나 준비 미숙, 뒷받침 되지 않은 체력 등으로 우왕좌앙하다가 망하게 된 2009년 여름 지리산 종주 그리고 이 블로그 포스트 – 우리 삶이 그렇다. 일이란게 시간과 장소가 맞아 떨어졌을 때 겨우 될까 말까하는 것이다보니 일반적으로 준비가 미숙하거나 서로 의견이 맞지 않거나 얘기치 못한 불상사로 인해 와해 되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다. 내년 이맘 때쯤이면 효근이는 미국에서 공부, 의현이는 치대 졸업을 한학기 앞둔 치대생, 정묵이는 당장 다음 학기에 뭘 할지도 모르는 석사 졸업 백수, 정호는 연구 한창일 박사과정, 나는 (아직 확정은 안 되었지만) 다른 팀 – 해외 사업팀 – 으로 옮겨서 잦은 출장 또는 아예 해외 주재원 생활할지도 모르는 불확실성에서 우리가 무엇을 마음에 담아두고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바깥 세상에는 고려할 것이 너무나도 많고 신경 쓸게 지나치게 많아 지쳐 답답했던 마음을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편한 녀석들에게 거친 욕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웃어제껴도 여전히 마음이 불안한, 하지만 그랬기에 아직 20대인 여름 휴가였다.

내년에 다시 도전해보고 싶지만 그 것은 어디까지나 나만의 소망일 뿐일까 아니면 서로 마음이 통하게 될까.

3 thoughts on “2009년 여름 지리산 종주

    • 1년 반에서 “내년 이맘 때 쯤” 즉, 1년 빼면 한학기 남는다는 얘기였는데 ㅋㅋ
      그래 겨울에도, 내년에도, 그 이후에도 쭈욱 어디든 가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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