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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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에스프레소 깔끔하다. 근데 영하씨는 판단할 때 주로 무엇에 의지하세요?”

“판단이라뇨?”

“저 같은 경우 직감에 의존하는 편이에요.  영하씨는 왠지 이성적으로 판단할 것 같은데?”

“네, 그런 것 같긴 해요. 근데 xx씨는 직감이라니, 무슨 얘기에요?”

“직감? 뭐… 예를 들어서… ” 직감이 뭐냐고 묻는 황당한 상황을 정리하느라 잠시 시간을 둔 그녀 왈, “배운거, 공식이 A가 옳다 말해도 왠지 느낌이 B를 택하라고 말해주면 B를 택한다는 얘기죠”

“아 – 그런데 그건 선택이라기 보다는 반응에 가깝지 않나요? 불에 데여서 아야! 소리 내는 것처럼?”

“아. 여기 혹시 리필 되나 보고 올게요.”

흥겨운 음악과 따스한 밤 공기가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 말해줄 것만 같던 그날 밤, 만난지 3분만에 포항에서 고등학교 나온 xx씨와 서로 아는 친구가 있음을 발견하면서 참 좁은 세상임을 신기해하고 살짝 날 만지기도 하면서 웃던 그녀, 한마디로 모든게 순조롭던 소개팅호는 위에 기록된 교신 이후 얼마 안가 침몰했다. 이 에피소드를 친구에게 말했더니 내가 마음 속으로 xx와 소개팅 망하길 간절히 원했더라도 저보다 확실하게 그리고 병신같이 쫑낼 수는 없었다고 평했다. Chris Rock 왈, 여자가 (순한 표현으로) 남자를 좋아하게 될지 안될지 판단하는데 불과 5분채 안 걸린다고 한다. 그 5분 안에 멍청한 소리만 안하면 되는데 난 5분을 못 버틴 셈이다.

삶은 판단과 판단으로 이뤄졌다. 첫번째 판단은 쉬운 판단들이다. 예를 들어 303승 투수 랜디 존슨과 눈싸움할 것인가 말 것인가? 요즘도 야동 보냐고 캐묻는 여자친구의 질문에 솔직하게 말할 것인가? 포항공대와 카이스트 둘 중 어느 곳을 지원할까? 이런 경우 답이 명쾌해서 길게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 이런 질문에 관한 마음의 소리 따위 없다 – 판단이다.

두번째 판단은 본인이 좀처럼 확신 가질 수 없는 판단이다.  12년전에 스티브 잡스의 애플으로 입사해도 될까? 다음 대통령 선거에 나올 한나라당 후보와 민주당 후보 둘 중 하나 뽑으라면 누가 차악의 선택일까? 나의 평생 동반자로서 과연 X가 최선인가? 확실한가? 이들의 공통점은 답을 알 수 없지만, 선택한 후 그 선택이 옳았음을 자신을 포함한 남들에게 증명하기 위해서 입사자, 투표자, 그리고 남편으로서 기다림, 노력 그리고 희생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즉, 옳은 선택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내린 판단을 옳게 만드는 과정 자체에서 성패가 갈린다.

얼마전 생애 첫 에스프레소를 주문해서 마셨는데 당시 그녀의 질문, 그리고 나의 답변 떠올랐다. 그녀가 옳았다. 그녀는 무엇이 판단이고 무엇은 판단이지 구분할 줄 알았다. 숫자 놀음, MECE한 시나리오 플래닝이 답을 가르쳐준다면 그 것은 애초에 판단이라 할 필요 조차 없는, 상황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당시 나는 그런 사실을 모른채, 나의 샤프함을 강조한답시고 멍청한 소리나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는 나의 애프터 신청에 “제가 요즘 좀 바빠서요”라는 신속한 반응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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