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ng] 박정현 – 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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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꼭 전도하려 들려는 사람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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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가진 사람의 말, 글, 노래가 종종 간증의 도구로서 사용된다는 관찰 메모에는 1+1 패키지처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 그들이라는 태깅이 따라 붙는다. 따라서 신앙인이 남에게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증명 혹은 전달 수단으로서 일, 예술, 사랑하려 들 경우, 첫걸음부터 엉켜버리게 된다. 상대방에게 진지하게 무언가 전달하려고 노력해본 사람은 추상적 개념만으로 사람을 움직일 수 없음을, 군대를 움직이는 것은 승리의 영광이 아닌 전리품임을 깨닫고 눈 앞에 보이는 현상 앞에 엄숙하게 고개를 조아리게 된다. 현상만이 매체이다. 현상만을 기술하고 다룰 수 있다.

이런 적대적 환경에 놓여진 처지를 깨달으면 자신의 역할이 명확해진다: 삶을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삶에 지쳐 쓰러지더라도 주먹을 움켜쥐고 두 발로 딛고 일어서야지 영생에 기댈 수는 없다. 사람들이 넌 신앙인이니까 일, 예술, 사랑 그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할 수 없다가 내게 말할 때 나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일, 예술, 사랑 그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대답한다.

나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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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과 기업인의 역사를 읽으며 조심스럽게 주장하건데 대기업의 역할은 몇몇 능동적 사람들의 창작물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싸게, 보다 편하게 제공하는데 의의를 둔다. 1800년대 초반 법인, 주식을 Vanderbilt를 비롯한 몇몇 사업가와 자본가들만 이해하고 대중에게 어려운 개념였을 때, 즉 월가가 한산했을 때만 하더라도 법인이란 국가가 제공해야 할 공적 서비스를 대행하여 제공하는 조직이였다. 그 이후 수익 극대화를 위해 존재하는 단체로 목적을 잃었으나 여전히 대중 상대하는 조직임에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애초에 법인이란 누군가 잘 만든 것을 보다 널리 퍼트리는데 의의를 두는 법인의 특성 (최초 mp3 플레이어를 발전시켜 전 세계에 퍼트린 애플, 작은 안드로이드 개발사를 인수하여 아이폰의 대체재로 끌어올린 구글) 임을 잊고 “대기업 a사는 혁신적이지 못하다”, “남을 베끼는 데 급급한 b사”라고 평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의견으로서 얼마든지 유효하지만) 뚱뚱한 사람은 관성이 크다는 말과 별반 다를바 없다.

불만을 갖기 앞서 나의 불만이 올바른 대상,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주변 확인하는게 우선이다.  이처럼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이며 지금 상황에서 내가 맡아야 할 역할이 무엇인가는 묻는 습관은 5학년 때 한국을 떠나 낯선 나라, 이해할 수 없는 말로 가르치는 외국인 선생님과 소리 지르는 아이들 틈 사이에 던져진 때부터 길러진 듯 싶다. 한시도 편하게 분위기에 녹아들 수 없고 늘 이방인으로서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한 채 살아온 탓인지 원인을 알 수 없지만 늘 내 자신에게 묻고, 거기에 맞게 행동하는 이 습관은 나를 좀 더 나은, 좀 더 독립적인 사람으로 치켜 올려 세워준다 믿어왔다. 반대로, 내가 어디에 왜 있는지 있어나, 해야 할 역할이 불분명한 상황은 실패라고 판단했고 피했다.

그런 나였기 때문에 봉사의 실패는 어느정도 예상 되었다. 내가 해야 할 역할이 불분명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 곳은 분명 시작할 때 나의 참여가 이 곳에게 큰 도움이 되리 수 있을 것이라 자만하던 것이였기 때문에 더더욱 쓰라렸다. 그 외에도 다른 사건 때문에 나라는 사람을 총체적으로 돌이켜 보며 추스릴 시간이 필요했다. 과연 어디에서 뒤틀린 것일까? 그러던 어느 날부터 작가 자신을 Nekhlyudov처럼 중요한 역할 지닌 사람으로 그리는 Tolstoy보다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인물에 작가 자신을 투영시킴으로서 독자의 시선을 작가가 아닌, 일상 삶 속의 인물들에게 되돌린 Chekhov가 손에 잡히며 읽히기 시작했다. 나는 평균 이상 하는 사람이니까 내가 가르친 사람은 검정고시를 통과해야 하고, 내가 시간을 투자한 집단은 구조와 체계를 갖춰야 한다며 기대치를 내세우기 시작하면서 어느덧 주인공은 그 사람들이 아닌 내가 된 셈이였던 것은 아닐까?

관심을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람에게 다시 되돌리자. 내가 아니라 그들이자 그 사람이다. 나의 역할은 없다. 정확히 말하면 나라는 자아를 없애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그 것이 올바른 대상이자 올바른 방향인듯 싶다. 올해 나는 다시 시작한다.

드높임과 낮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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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And my speech and my preaching was not with enticing words of man’s wisdom, but in demonstration of the Spirit and of power: 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로 한 것입니다.

5That your faith should not stand in the wisdom of men, but in the power of God.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바탕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4~5절

글 쓰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에고가 강한 사람이다.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전해주고 싶은, 영향력을 끼치고 싶은 사람이다. 당대 석학이였던 사울에게 그런 마음이 없었을까? 하지만 그럴싸한 말로 자신을 내세우고 지혜를 자랑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드높이기 위해 자신을 낮춘다는 위에 말씀은 참으로 감명 깊었다. 성경 읽으면서 가졌던 불만 중 하나가 – 왜 하나님은  헤밍웨이보다 글 못 쓰는 사람에게 쓰라고 시켰을까?

“I’ve been wondering about Dostoyevsky,” I said. “How can a man write so badly, so unbelievably badly, and make you feel so deeply?”

A Moveable Feast, p.137

이유가 있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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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몸 불편해 보이는 할머니께 옆에 누가 자리 양보 했는데 괜찮다는 손시늉을 하시더니 봉투에서 주섬 주섬 뭔가 꺼내 무릎 위에 툭 내던졌다. 아, 껌 파시는 사람이구나.  불평불만 가득함과 동시에 만사 귀찮다는 표정으로 껌을 거의 사람 맞추시다시피 던지면서 한바퀴 돌기 시작했다. 설사 앵벌이라도 일단 사주는 사람인 나조차 이 할머니만은 도와줄 수 없다는 마음에 책을 눈 높이로 올려서 못본척 했다. 책 넘어 힐끔 보아하니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이 할머니에게 돈을 건네주지 않는다. 문득 떠오르는 질문: 사회 중산층의 선행이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다고 상대방의 자세를 평가하게 되는 것일까? 껌 팔면서 얼굴 좀 험상 궂으면 어떻다고 고작 껌값 천원 때문에 노약자에게 ‘껌 팔려면 적어도…’ 라며 광대질을 무언으로 요구하던 내 자신을 돌아보건데 돈이란 것이 참 오묘해서 액수가 아무리 작아도 사람 대하는 방식을 바꾸는 듯 싶다.

한동안 나는 안철수라는 사람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의사가 백신 개발하는 도전정신은 높이 샀으나 요즘 들어 강연하고, 무릎팍 도사에 등장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문성보다) 좋아하는 ‘인간성’을 부각하려는 모습이 무척 위선적으로 느껴졌다. 그럴 시간 있으면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 제품을 향상하고, IT 전도사를 자처할 시간에 차라리 기업이라도 하나 더 만드는 것이 좋다며 그의 숱한 사외(?) 활동에 섵부른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그렇다, 당시 나는 안철수 연구소 주식 보유하는 개미 투자자였고 우리나라 대표 IT 기업이라는 회사 주가가 수년째 2만원선에서 맴돌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주식을 팔며 광명을 찾자 돈 안 벌어주는 철수가 인간 안철수씨로 변했다. 그렇다면 내 돈과 엮이지 않게 되자 안철수라는 사람이 보였으니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안철수가 CEO가 아닌, 의사가 아닌, 평범한 사람일 때도 과연 인간 안철수가 보일까?

이쯤되면 한번 묻게 된다 –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하고 모시기 위해  선행 되야할 조건은 무엇일까? 그 사람에게 돈과 권력이 없으면 적어도 눈을 이끌만한 다른 매력 하나정도 있어야 하는 것일까? 거지도 그냥 거지보다는 재주 부리는 원숭이 데리고 다니는 거지가 좀 더 눈에 띄고 돈도 잘 번다. 조련된 동물이 없다면, 적어도 Wyatt Cenac의 Turkey Creek 에피소드 의하면 새 서식지 주변에 알짱 거려야 한다. 150년전 해방 찾은 노예들이 세운 Turkey Creek 동네에 지속적 관심 갖고 영향을 주는 유일한 사람은 정치인도 아니고 기업가도 아닌, Audobon Society였던 것이다.  Audobon Society는 이제 와서 Turkey Creek에서 설레발 관심 갖는 자들과 차별되게 오래전부터, 이 동네가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잠겼을 때부터, 관심을 가져온 집단으로서 허리케인 카트리나로부터 조류를 보존하기 위해 새집을 지었다고 말한다.

원숭이, 새 외에 다른 매력을 찾아보려고 생각해봤지만 어느 이유 하나도 상대방을 미천하게 만들 뿐, 상황을 개선시키지 않았다. 이쯤되면 돈도 아니고 다른 매력도 아니고 그저 이웃이니까, 사람이니까 사랑하는 것이 정답 아닐까 생각해본다. 조류 때문에 Turkey Creek을 살리는 것은… 정말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