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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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과 기업인의 역사를 읽으며 조심스럽게 주장하건데 대기업의 역할은 몇몇 능동적 사람들의 창작물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싸게, 보다 편하게 제공하는데 의의를 둔다. 1800년대 초반 법인, 주식을 Vanderbilt를 비롯한 몇몇 사업가와 자본가들만 이해하고 대중에게 어려운 개념였을 때, 즉 월가가 한산했을 때만 하더라도 법인이란 국가가 제공해야 할 공적 서비스를 대행하여 제공하는 조직이였다. 그 이후 수익 극대화를 위해 존재하는 단체로 목적을 잃었으나 여전히 대중 상대하는 조직임에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애초에 법인이란 누군가 잘 만든 것을 보다 널리 퍼트리는데 의의를 두는 법인의 특성 (최초 mp3 플레이어를 발전시켜 전 세계에 퍼트린 애플, 작은 안드로이드 개발사를 인수하여 아이폰의 대체재로 끌어올린 구글) 임을 잊고 “대기업 a사는 혁신적이지 못하다”, “남을 베끼는 데 급급한 b사”라고 평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의견으로서 얼마든지 유효하지만) 뚱뚱한 사람은 관성이 크다는 말과 별반 다를바 없다.

불만을 갖기 앞서 나의 불만이 올바른 대상,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주변 확인하는게 우선이다.  이처럼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이며 지금 상황에서 내가 맡아야 할 역할이 무엇인가는 묻는 습관은 5학년 때 한국을 떠나 낯선 나라, 이해할 수 없는 말로 가르치는 외국인 선생님과 소리 지르는 아이들 틈 사이에 던져진 때부터 길러진 듯 싶다. 한시도 편하게 분위기에 녹아들 수 없고 늘 이방인으로서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한 채 살아온 탓인지 원인을 알 수 없지만 늘 내 자신에게 묻고, 거기에 맞게 행동하는 이 습관은 나를 좀 더 나은, 좀 더 독립적인 사람으로 치켜 올려 세워준다 믿어왔다. 반대로, 내가 어디에 왜 있는지 있어나, 해야 할 역할이 불분명한 상황은 실패라고 판단했고 피했다.

그런 나였기 때문에 봉사의 실패는 어느정도 예상 되었다. 내가 해야 할 역할이 불분명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 곳은 분명 시작할 때 나의 참여가 이 곳에게 큰 도움이 되리 수 있을 것이라 자만하던 것이였기 때문에 더더욱 쓰라렸다. 그 외에도 다른 사건 때문에 나라는 사람을 총체적으로 돌이켜 보며 추스릴 시간이 필요했다. 과연 어디에서 뒤틀린 것일까? 그러던 어느 날부터 작가 자신을 Nekhlyudov처럼 중요한 역할 지닌 사람으로 그리는 Tolstoy보다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인물에 작가 자신을 투영시킴으로서 독자의 시선을 작가가 아닌, 일상 삶 속의 인물들에게 되돌린 Chekhov가 손에 잡히며 읽히기 시작했다. 나는 평균 이상 하는 사람이니까 내가 가르친 사람은 검정고시를 통과해야 하고, 내가 시간을 투자한 집단은 구조와 체계를 갖춰야 한다며 기대치를 내세우기 시작하면서 어느덧 주인공은 그 사람들이 아닌 내가 된 셈이였던 것은 아닐까?

관심을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람에게 다시 되돌리자. 내가 아니라 그들이자 그 사람이다. 나의 역할은 없다. 정확히 말하면 나라는 자아를 없애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그 것이 올바른 대상이자 올바른 방향인듯 싶다. 올해 나는 다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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