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ng] 나와 같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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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 목마른 자를 위한 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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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직장인들이 내게 “영어 공부하기 위해 어떤 책 읽으면 좋나요?” 물어볼 때 지체하지 않고 헤밍웨이를 권유한다. 앰뷸런스 경험을 살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나 등등 반전 소설 쓴 그의 경력과 우울증 끝에 엽총 물고 방아쇠 당긴 그의 말년을 보면 헤밍웨이는 어느 누구보다 진지한 태도로 삶을 바라보고 접근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단편 소설들은 내가 여지껏 느껴본 가장 순수한 독서의 즐거움 그 자체이다.  오랫동안 글을 읽지 않아 책이 목마른 직장인에게 필요한, 물맛 좋은 물이라고나 할까?
나는 마감을 앞두고 정신없이 일, 짬날 때는 그레이 아나토미같은 25분짜리 드라마 보면서 시간 대부분을 보내다가 간만에 집어든 책이 반드시 의미 있고 지친 나를 위로해주는, 방랑하는 나의 앞길을 밝혀주는 책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헤밍웨이의 글 안에는 내가 찾아 헤매야 할 상징주의도, 옹립해야 할 보편적 가치도 없다. 그저 글 따라 읽으면서 따라 그려지는 풍경, 등장 인물들의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전해질 뿐이다.
글 읽기 마치면 처음에는 뭔가 속은 느낌도 들고 내가 혹시 놓친 메세지가 있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으로 손에 침 발라가며 앞뒤를 다시 찾아봐도 여전하다. 그리고는 아쉬움과 실망이 섞인 마음을 뒤로 하고 책을 덮어 일상 생활로 돌아간다. 한물간 낚시꾼, 세계 대전 참전한 앰뷸런스 운전수 이야기가 21세기 나와  연관 있을리가 없다면서 괜한 시간낭비였다고 자위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때부터 헤밍웨이의 마법이 걸리기 시작한다. 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고양이를 찾아 밖에 나선 미국인 아내가  떠오르면서 혹시 밖에 추워 떨고 있는 고양이가 있지 않나 밖을 내다볼 때, 킬리만자로 정상에 실제로 표범 시체가 있는지 궁금해서 위키피디어를 찾아볼 때, 이처럼 헤밍웨이가 기록한 장면이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면서 바깥 세상으로 연결 시키기 시작할 때 비로서 한줄 한줄 읽어가면서 내 머리 속에 그려졌던 하나만의 세계의  완결성에 뒤늦게 감탄하게 된다.  세상이 넓어지고 궁금해지게 하는, 진심으로 읽기가 즐거운 글이다.

내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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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의 규모가 다섯명이든 50명이든 3000명이든 상관 없다, 대학교 졸업증이 입사 지원 자격이 아닌 직장을 만들고 싶다.

경쟁 우위를 갖추기 위해 직원에게 남다른 재주, 창의성을 요구하는 직장이 아니라 어느정도 정직하고 어느정도 성실하고 어느정도 근성 있으면 큰 무리없이 직장인임과 동시에 누구는 아빠, 누구는 엄마, 누구는 싱글, 누구는 미혼모로서 각자 맡은 바를 할 수 있는 만들고 싶다. 누구나 아침에 일어나면 똑같이 바지 입고 똑같이 이 닦으면서 똑같은 24시간을 보내니까 …

한 때 나는 ‘최첨단’을 달린다는 IT 업계에서 일한다고 생각했으나 최첨단 기술은 메모리, 광섬유, 무선통신 분야 연구원들이지 나는 사람과 일한다.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해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듯이 본능적으로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 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재정적으로 파산한 지붕 밑에서 태어나듯이 감정적으로 피폐하고 예민한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부분적으로 재능이 있기도 없기도 하듯이 평생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결과적으로) 그릇된 선택에 대해서 죄책감 느끼기를 끔찍히 싫어하는 나머지 회피하는 사람도 있고 도리어 bring it on! 외치면서 자가 발전의 기회로 삼는 사람도 있다.

언젠가 그 사람들을 다 만나보길 기대한다.

최고의 가치가 아닌, 사람을.

“What are you so uptight ab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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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are you so uptight about?”
고등학교 전학 이후 첫 파티 때 친구가 건넨 대마를 거절하자 내게 속삭인 말이다.

좋은 말로 하면 모범생, 나쁜 말로 하면 답답하기 그지 없는 나는 외국에서 초중고를 다니는 동안 그 흔하디 흔한 마약도 해보지 않았고, 내 몸에 문신은 커녕 담배빵 하나 없다.  The quiet Asian guy, that’s who I was. 아시안 학생답게 책 읽고, 에세이 쓰고, 시험보는 것은 쉬웠던 반면,  Q&A 시간 또는 학우들과의 일상 대화가 따라가기조차 벅찼던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말은 나중에 사전으로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의 말을 필사적으로 외우는 습관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에… 그렇게 예민한 나의 내면은 호기심과 열등감이 늘 뒤셖여있던 것 같다.

모든 고민, 두려움, 불안에 불을 붙여서 달콤한 연기로 날려버리라는 친구 말을 거절했을 때, 딱히 내 몸을 소중히 여기였다거나 장래 정치인이 될 몸을 미리 걱정해서 내린 계산적 판단이 아니였다. 단지 나의 감정이 그런식으로 방출 할 수 있다는 말 자체를 믿지 못했다. 살다보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더라도 떠나야 할 때가 있기 마련인데 당시 나의 좁은 머리는 2차원 공간 즉, 다른 나라로 떠나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했지 사이키델릭 4차원은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동하더라도 내가 하고 싶다는, 자아에 대한 미련이 있었다. 내가 웃고 싶었지, 화학성분이 떠도는 공기가 날 웃겨주길 바라지 않았다. 그런 날 보고 주변에서는 쉽게 생각하라지만 의식적으로 생각을 버린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여전히 자아에 대한 미련이 있다.
그 이후로 줄곧 잡아둔 자아 탓인지, 그녀에게서 나와 비슷한 냄새를 맡았을 때 난 너무나 기뻤다. 그 동안 어디있었냐고, 이제 더 이상 사람들 틈 사이에서 가면 쓰고 남들처럼 행동할 필요 없이 편히 드러내도 된다고 함성 질렀다. 하지만 서로 알아보는 그 자체가, 그리고 나의 갑작스러운 함성이 상대방에게는 불편했던 것 같다. 그녀도 나처럼 예민한 것이였다.
젊었을 때 사회주의자가 되어보지 않은 사람은 멍청이. 나이 들어서도 사회주의자인 사람은 멍청이란 말이 있듯이 30이 되기 전까지는 자아를 찾고 30이 지나면 자아를 버린다고 한다. 어떤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이 들면 사람이 바뀐다는 말 같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 되겠지.
해결 되겠지.

누가 말 잘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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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노래 잘부르는가가 최근 많은 이들의 관심사이지만 내가 즐겨 가는 게시판에서는 “누가 말 잘하는가?” 질문에 손석희다, 섹드립 최강자 신동엽이다, 사귈 때부터 말싸움을 이긴적 한번 없는 아내다 등등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다. 내 경험상 말 잘하는 사람은 입 다물어야 할 때 입을 다무는 사람이다. 주변 누군가가 쓸데 없는 말을 하는 바람에 곤혹을 치뤄본 사람이라면 수긍할 것이다.

입을 좀처럼 다물지 못하는 이유에는 지적 능력을 뽐내고 싶어하는 경우,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한 경우, 새로운 가씹거리를 전달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에 더렵혀지지 않은 귀를 찾아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경우 등등 많고도 많다. 하지만 가장 대표적 이유는 전달할 수 없는 말, 표현할 수 없는 감정, 사고의 범주를 벗어나는 무언가를 앞에 두고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을 표출 못하는 답답함을 당장 해소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행동이든 – 추후 결과에 대한 생각 없이 – 취하는 것이 너무나도 약하다면 약한, 사회적 동물이라면 사회적인, 인간적이라면 인간인 우리 대부분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말로만 온전히 전달되기 힘든 세계관을 삶의 지침으로 삼고 의지한다는 기독교인이 침묵을 지켜야 할 때 남들만큼도 입을 닫지 못하고 세치 혀를 놀리는 작태는 필히 비판 받아야 한다. 바야흐로 기독교에 (철학으로 치자면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급의 강력한 (이 역시 비트겐슈타인이 저서를 통해 사용한 단어인) ‘사실’이 나와야 할 때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의 부재가 God is a salesman처럼 자극적 상업적 문구와 (이제는 널리 사용되어 친근하기까지 한) “하나님은 사랑이다”와 같은 허언으로 이어졌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말이 왜 허언인가를 이해하기 앞서 도움되는 말 한마디:

Young man, in mathematics you don’t understand things. You just get used to them.

– John Von Neumann (Reply to sayer of “I’m afraid I don’t understand the method of characteristics.” )

성경 구절을 뜻을 이해하고 암송하기 전, 우선 성경 자체에 익숙해져야 한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사랑의 표현 방식과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 방식은 다르기에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그저 단지 하나님의 표현 – 구약 39편 신약 27편에 걸쳐 나타난 하나님의 표현 – 방식에 익숙해질 뿐이다. 의자를 텅빈 방 한 가운데 떡하니 놓으면 의자로서 제 구실을 못하겠거니 내가 아무리 의자라고 주장한들 의도가 전달 될 수 없기에 실속 없는 말 즉, 허언이다. 의자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의자 높이와 사람의 다리 길이가 얼추 비슷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의 손 높이에 맞춰 제작된 탁자 옆에 의자가 놓여있어 앉는 기능을 수행할 때 비로서 의자가 된다. 이런 문맥적 사용 패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전도자 삘에 꽂히는대로 성경 구절 몇마디 녹음하여 틀어놓고 ‘사랑의 역사’가 이뤄지도록 방관하는 것은 다시 한번 말하지만 허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가 허언인 또 다른 이유는, 사랑이라 성급하게 규정 지음으로서 다른 가능성을 빼앗았다. 하나님의 이름(?)을 출애굽기 (구약 중에서 앞부분)에 밝힌바 있다. 애굽(이집트)에 가서 고통 받는 백성을 구하라는 하나님의 명 받은 모세가 대놓고 가기 싫다고 말은 못하겠고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하나님의 특성(?)을 얍삽하게 이용해서 안 가려고 물어본다:

And Moses said unto God, Behold, when I come unto the children of Israel, and shall say unto them, The God of your fathers hath sent me unto you; and they shall say to me, What is his name? what shall I say unto them? (Exodus 3:13)

이에 하나님은 답하시길, (번역이 무척 까다롭지만 시도하자면) 하나님이 밝히시길, 나는 존재다.

And God said unto Moses, I AM THAT I AM: and he said, Thus shalt thou say unto the children of Israel, I AM hath sent me unto you. (Exodus 3:14)

“나는 존재다”는 우리(= ~하나님)는 존재물 (= ~존재)이다를 함축하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이른바, 규정되지 않으며 한계가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지도 아니지도 않다. 하나님은 전지전능이지도 전지전능 아니지도 않다. 우리는 하나님을 규정지을 수 없음을 성경 초창기에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기 때문에 “하나님은 xx이다” 는 허언이다.

허언을 삼가하자. 그 것이 말 잘하는 것이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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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윤봉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