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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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ri가 The Art of Dramatic Writing에서 premise-character-conflict (unity of opposites) 이 세가지를 중심으로 연극을 쓰라고 닥달치는 이유는 premise 즉, 작가가 증명하고자 하는 대전제가 뚜렷해야 인물과 투쟁이 대전제를 증명하기 위한 초석으로 적절히 활용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리하여 Egri가 그린 연극 청사진은 마치 오밀조밀한 톱니바퀴 많아서 숙련된 장이만이 만들 수 있는 기계식 시계를 떠올린다. 하지만 Egri와 같은 선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무대에서 총이 등장하면 그 총은 반드시 사용될 것이다” 문구가 Buchner의 연극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Buchner의 “당통의 죽음”은 진지한 역사를 다루면서도 ‘나 여기에 있어’를 외치듯이극의 흐름과 무관한 뚱딴지 인물이 나타나기도 한다. 연극의 흐름이라는 틀 안에서 본다면 매우 혼란스러운 작가인 셈이다.

Shakespeare 이전의 연극 등장 인물은 “Greed”, “Lust”, “Naivete” 와 같이 단어를 의인화 시키는 것이 통상적이였던 반면, Shakespeare는 특정 인물 안에 각종 인간의 약점 세트를 집약시킴으로서 – Othello 안에는 자부심과 질투를, Romeo 안에는 성급함과 순진함을 – 드라마적 요소가 풍부한 씨앗을 심어놓았고 이를 바탕으로 그 어느 누구보다 인간 내면을 깊숙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이에 반해 깊은 신앙심, 방대한 인문학적 독서량, 물고기 신경조직에 대한 발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분석적 머리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일까, Buchner는 Shakespeare보다 한단계 더,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환상과 욕구를 분리한다. 그는 우리 삶에서 낭만, 환상이란 찌꺼기를 과감히 솎아내고 역사 그대로 담고 어디를 향해서 표류하고 있는지에 밝히고자 했다.

극작가란 제가 보기에 역사가와 다를 바 없습니다. 전자가 우리에게 역사를 재구성해 준다는 점과, 메마른 이야기를 전해주는 대신에 우리를 한 시대의 삶 속으로 직접 옮겨 놓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인물 묘사 대신에 인물 그 자체를 보여주고, 기술(記述) 대신에 형상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후자보다는 우위에 서 있다고 하겠습니다. 극작가의 최대의 과업은 사실 그대로의 역사에 가능한 한 가까이 다가가는 일입니다. 그의 책은 역사 자체보다 더 윤리적이어도, 덜 윤리적이어도 안 될 것입니다. 역사란 사랑하는 주 하나님께서 젊은 아낙네들이나 읽으라고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Georg Buchner, 양친에게 보내는 편지 中에서

작품을 통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혹는 역사는 승자의 전유물과 같은 이분법적 역사관에서 – Buchner가 편지에서 말하는 젊은 아낙네들이 읽기 위한 역사를 “역사관-A”이라 부르자 – 벗어나서 있는 그대로를 담아온다. 역사관 – A는 역사가가 나쁜 의도를 가지고 왜곡했다기 보다는 징검다리와 같이 띄엄 띄엄 남겨진 불완전한 증거와 기록 사이를 메꾸기 위해서 비이성적인 인간 머리에서 나온 논리적 추측이 이뤄질 때 필연적으로 뒤따라오는 근본적 짐이자 한계이다. 한국 정부가 일본의 역사왜곡을 비난해왔지만 우리 역사 또한 그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그리고 우리 개개인마저 역사관 – A의 오류를 거듭 범함을 알 수 있다. 변호사가 피고측에게 불리한 자료를 제외한 기타 증거물과 ‘논리’로 재판의 결과를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오고,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고 헤어진 후 어떤 기억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어떤 추한 기억을 버리는지 돌이켜보면 우리 또한 역사관 – A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어쩌면 진화를 통해서, 생존을 위해서 역사관-A 입장을 취하도록 유전적으로 코딩이 되어있는지 모른다. 하나 덧붙이자면 나는 역사관 – A는 미학적 – 사람은 논리적이며, 대칭적이 곧 아름다움이며, 황금비율이 안정적이다 등등 – 관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면, Buchner는 역사관 A를 벗어던진다. 주변 친구들은 Danton에게 Robespierre과 맞서 싸우라고 권유하지만, 그런 싸움조차 뛰어들기를 거부하는 그를 보고 너무 게을러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며 체념해버린다. 다려진 옷만 입고 술도 안 마시는 청렴결백한 Robespierre과 달리, 여자의 허벅지를 탐하고 인간의 추한 욕구를 거스름 없이 드러내는 당통을 보면서 일부는 그를 게으르고 외설적이다, 성경에 충실치 못한 사람이라 생각할 것이다.그래 – 당통의 세계관은 확실히 생존 스킬 측면으로 볼 때 빵점짜리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Buchner가 당통을 통해서 알리고자 하는 것은 한낱 루저인생이 아닌, 삶 그자체였다.

작가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해서는 안 되고 세상이 어떻게 존재해야 할 것인가를 묘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그 사람한테 이렇게 얘기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이 세상이 어떻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다 아시고 이 세상을 만드셨을 텐데, 그런 하나님보다 더 좋은 세상은 만들고 싶지 않노라고 말씀입니다.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에 대해서 말하기보다 사람이란게 그럴 수 있기 때문에 그 모습 자체를 보여주면서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를 우리에게 던져줬다.  하지만, Buchner가 시보다 보수적인 희곡을 통해 깨부순 벽을 실제 우리는 200여년이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전지대 안에서 – 인류 역사상 이토록 과잉보호 받는 세대가 있을까 – 서성일 뿐,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독서가 반복되고, 만남이 반복되고, 역사가 반복된다.

반복; Recollection과 Repetition.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