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그리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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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의 관점으로 보면 이집트 벽화는 우스꽝스럽다. 하지만 당시 이집트 벽화는 당시 벽화가 수행하고자 했던 기능 – 왕이 죽을 때 지하세계까지 안전하게 가줄 하인들을 생매장하는 순장 문화가 지나치다고 판단되자 (일종의 훼이크로) 왕이 지하세계에 가져갈 소유물을 그려넣는 기능 – 고려해보면 높은 완성도를 보이는 작품이다. 이들의 그림은 소유물을 객체로서 식별하기 위해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일까를 묻고 그에 대한 답을 그려넣었기 때문에 우리의 미적 감각으로 섵불리 판단하기를 자제해야 한다. 그 이유인즉,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앞서서 무엇을 그려야 할지에 초점이 맞추진 작품이다. 상상해보자: 사람을 그리라고 명 받으면 어떻게 그려야 할까? 강한 사람(남자)을 그리려면 어떡해야 할까? 이집트인들은 양쪽 어깨를 보여줌으로서, 딱 벌어진 체형이 사람이라고 규정했고, 남자는 여자보다 무조건 피부색이 짙어야 한다 식으로 자신들이 만족할만한 답을 찾았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답은 간결하고, 방해하는 겉치장이 없기 때문에 쉽게 이집트 벽화를 알아 볼 수 있다.

피카소의 수탉이런 질문을 묻는 것 – 무엇을 그릴 것인가 – 그리고 답을 찾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예를 들어서 한국인 남자를 그리라고 하면 과연 어떻게 그려야 할까? 한국인 남자와 외국인 남자를 구분할 수 있는 요소들이 과연 무엇일까? 한복, 상투를 떠올린들 한국인이라 할 수 없듯이 겉표면을 그리는 것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막막하다. 피카소가 수탉 안에 수컷의 특유의 바보 같음, 허세 잡아내듯이 한층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피카소가 나를 그렸다면 무엇을 그렸을까? 하나님은 어떤 모습을 생각하고 날 흙으로 빚으신 것일까? 레쥬메에 나온 몇줄 어디 졸업하고 어디에서 일한 경력으로 설명되는 사람일지 그림으로 그려질 수 있는 사람인지 한번쯤 생각해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좋아하거나 혹은 싫어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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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이 그린 성모 마리아께서 아기 예수를 바라보며 짓는 표정에는 온화함이 감싸돈다. 표정에서 뿐만 아니라 화사한 봄 날 배경에서, 한쪽으로 무게를 실으면서 느긋한 자세로 아기 예수를 감싸돌며 십자가를 건네 받는 아기 예수가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손 이 모든 것들이 안정적이며 따스하다. 그러나 내가 초원의 성모 마리아가 종교화로서 완벽하다고 말할 때는 온화함 이상의 느낌 즉, 이 세상을 십자가로 구원할 아기 예수의 운명을 알고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느낌이 등장 인물들의 배치를 통해 가장 완벽하게 전달 되기 때문이다.
가령 내 머리 속으로 다른 방법으로 배치하여 동일한 느낌을 낼 수 있는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본다. 성모 마리아가 왠지 아쉬워하는 마음에 고개를 기울였더라면?  아기 예수가 성모 마리아처럼 오른편을 향해 몸을 돌렸더라면? 초원이 아닌, 허름한 마굿간을 배경으로 했더라면?  그 느낌을 더 정확하게 전달해줄 수 있는 배치가 무엇이였을까 한참 고민하다가 역시 나보다 라파엘이 배치를 더 잘했다! 싶을 때 비로서 라파엘이 잘 그렸다고 느껴진다. 라파엘이 가장 잘 그렸다고 느끼면, 1505년 이후 등장한 예술 매체들이 과연 이런 느낌을 보다 잘 담아낼 수 있었을까를 고민해본다. 오르간 연주가라면 과연 어떻게? Tomoko Uemura in her bath 찍은 Eugene Smith라면 어떻게 찍었을까? 자동차 위에 누운채 양손에 못을 박은 Chris Burden였다면? 내가 아는 여러가지 기법을 통해 어떻게 표현할까 고려해봤음에도 불구하고 라파엘만이 유독 효과적으로 전달했고 느낄 때, 아니 라파엘 외 이를 표현할 사람이 없다고 느낄 때, 라파엘의 이 그림은 완벽하다고 말한다. 내게 세일즈맨의 죽음보다는 햄릿이 비극으로서 완벽하듯이, 심판의 날보다 초원의 성모가 종교화로서 완벽하다 (아직까지 난 심판의 날에는 큰 소리가 날 것이라는 느낌 탓인지 그림이란 매체으로 표현하기에 다소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나는 이와 다른 이유로 ‘초원의 성모’를 좋아할 수도 있었다. 순결해 보이는 여자 앞에 있는 천진난만한, 포동 포동한 아이들 모습이 보기 좋아할 수도 있었다. 거무칙칙한 일상에 지친 나머지 화사한 색채가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평소 그리던 이상적 어머니상과 부합하기 때문에 안심을 가져다 줄 수도 있었다. 이처럼 하나의 작품을 좋아하게 되는 과정에는 적절한 혹은 부적절한 사유란 없다. 하지만 작품을 멀리하기에 부적절한 이유가 엄연히 있다. 노동자가 피땀 흘려 만들어낸 부르죠아 산물이라는 이유로, 김동인이 친일파라는 이유로, 혹은 바그너의 음악이 나찌 선전물로 이용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배척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개인의 감성보다 사회적 논리를 우선시하여 작품을 배척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물론 앞의 이유 때문에 감정과 연결될 수 있는 촉을 잘라버린들 당장 그리고 먼 미래에도 큰일이 일어나진 않는다. 술 마시면서 뇌세포 하나쯤 죽는다고 삶이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진 않듯이 위에 작품들 모르거나 싫어한들, 얼마든지 배부르게 먹고 깨알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 하지만 잘라 버린 이유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않음으로서, 남들의 눈을 의식하다보니, 사회적으로 행동하다보니 멀리하게 된 것이라면 이는 예술, 적어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을 논할 때 통용되어서는 안될 논리다.
취향은 다양할 수 있지만, 나만의 취향과 감정은 유일하며 소중하기 때문에 발전될 수 있다. 따라서 남의 눈을 의식하여 매번 “개인의 취향이니 존중해주세요”를 멘트를 달면서 애써 까방권을 확보할 필요가 없다. 작품을 이해하고, 즐기면서 얻는 부는 지구 위에 축적되지 않고 나의 영혼에, 하늘 위에 쌓이는 것이다. 좋아하거나 혹은 싫어하거나 – 그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이다. 타인 그 어느 누구도 그 것을 빼앗을 수 없다.
http://www.googleartproject.com/ 를 다시 한번 환영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