놈놈놈을 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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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놈놈놈 보고 나서 참담한 이 마음을 어찌 달랠까.  분한 마음을 못 참고 회사 동료 가형 대리님한테 “대체 눈이 어디 달렸길래 이딴 영화를 추천한 거에요! 크앙” 라고 문자 보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정우성 넘 멋지지 않아? +_+” 할 것 같아 나의 동지를 찾아 인터넷으로.  얼마 안되서 주연급 배우들 나온 디워다, 영혼이 없다 등등 악평이 속속히 드러난다. 또 다시 한번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nhn (네이버)라는 인터넷 회사에 다닌답시고 놈놈놈을 검색해보지도 않는 나는 과연 회사 다닐 자격이 있는 것일까? 영화 하나 잘못 고른 것 때뭉네 직장 동료에 대한 믿음에 자신의 직업관까지 흔들리다니 뉘집 아들인지 몰라도 참 잘되는 꼬라지다.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대체 영화가 전하고자 하던 메세지가 무엇일까?’

생각 없이 빵야 빵야 쏘면서 피비 뿌리고 킬킬 웃어보자, 라고 하기에 뭔가 찜찜하다. 윤태구(송강호)는 팔다리 총 맞아도, 석유에 불 붙어도 살아남는 기이한 캐릭터라는 사실? 그게 정 보고 싶었으면 네이버 웹툰 접속해서 만화 정글고 첫회 ‘불사조’로 해결될 일이고 구리빛 피부의 박창이(이병헌)과 롱코트 간지 박도원(정우성)이 필요치 않았다. 문득 써놓고 보니 이병헌이 김지운 감독과 <달콤한 인생> 찍으면서 불사조를 이미 선보인바 있는데 내가 그 점을 왜 간과했을까 한탄스럽다. 이래서 역사 공부를 해야한다.

어찌됐든 연극/뮤지컬/영화는 전하자는 전제-premise-가 있어야 하고 캐릭터를 통해서 전제를 증명해야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 모든 것이 돈을 위한 사나이들의 서부극이다.  윤태구는 기차 터는 좀도둑였는데 우연찮게 지도를 찾아서 대박을 노리는 좀도둑. 박창이는 매국노의 돈에 의해 길들여진 사냥개였는데 결국 늑대 본성 못 버리고 주인을 문다. 왜 물었을까?  매국노에게 간간히 받는 월급으로는 이제 더 이상 통이 안차고 지도가 탐났기 때문이지.  (I’ll come back to this point) 그렇다면 박도원은 왜? 이 역시 돈이다. 독립군이 지도를 되찾아달라는 부탁에 내가 왜 도와줘야하는데? 식의 시큰둥함이 박창이에게 걸린 현상금을 주겠다는 말 한마디에 설득되었거든.

하지만 영화 끝에 가면 지도는 여러 사람들을 한 곳에 모으기 위한 미끼였을 뿐, 최강자가 누구인가를 가리는 남자의 로망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자 최종점이다. 그리고 찬찬히 까보면 캐릭터들이 최강자 가리기라는 전제 자체를 지지하지 않는다.  하나 하나 둘러보자.

박창이 (이병헌)

최강 3자 대면 텍사스 ok목장 결투를 제안한 박창이는 이 전제를 이끌어가는 인물이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부하들에게 윤택구가 최강인지 아니면 자신이 최강인지 확인할 수 있는 순간까지 살아남으라고 외치고 그에게는 조선땅에서 윤택구에게 손가락 짤리면서 불타는 복수심이라는 동기마저 있다.  하지만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면 캐릭터 자체가 이리 저리 쓸려다니는 부평초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박창이가 만주, 아니 대륙 최강자라고 바로 영화 첫장면에서 치켜 세워준 장면과 박도원이 탐낼만한 악질이라는 사실 외에 박창이가 최강임이 전혀 증명되지 않는다. 나중에 전투신을 검토하면서 세봐야겠지만 (다시 볼 생각하니 눈 앞이 아찔) 윤태구/박도원이 죽인 악당 수와 박창이가 죽인 사람 수를 비교하면 아마 4:4:1도 채 못될 정도로 킬수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 그도 그럴 것이 태구 똘마니, 만길이 하나 죽이는데 대체 몇번이나 때리고 칼질을 해야했으며 손가락 하나 못 잘라서 쩔쩔 매는 박창이가 과연 몇이나 죽여봤을까? 얼마전에 초등학생이 혈서 쓴답시고 커터칼로 손가락 베었다는 뉴스 기사를 봤는데 혈서는 베인 손가락에서 나온 피로 얼마 쓰지 못한다. 새끼 손가락을 부러뜨려야 피 뚝뚝 떨어지는 혈서용 붓이 비로서 완성된다. 즉, 손가락을 자른다는 것은 엄청난 힘을 요구하는데 만길이 손가락이 무슨 치킨집 무인마냥 썰려는 박창이, 사람 죽여본 놈 맞아? 조질려면 <친구> 유오성이 조지듯이 두번다시 못 쳐다볼 정도로 조지고, 자를 것이면 철근이라도 자를 기세로 자르란 말야.

결국 영화 내내 임팩트 있는 살해 장면 보이지 못한 박창이가 그나마 좀 의미 있는 살인을 하는 것이 매국노 암살하는 장면인데 이마저 빈약하기 그지 없다. 총으로 협박하는 경우 2-3미터정도 떨어지는 것이 이상적이며 근접 전투시 칼이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관객들에게 매국노 – 자본가인 그가 가장 잘 사용하는 살인(?) 기구라 해봤자 주판 밖에 더 있을까 – 목에 칼 꽂았다고 대체 뭘 증명하냐 이거지. 게다가 자본가를 죽인 후에 ‘마치 즐겼다는 듯이’ 레코드 노래 트는 장면은 영화 식스 센스 보는 내내 유령을 의심해본 적 없는 둔치 나조차 예측할 수 있던 cliche였다.  살인을 즐기는 모습은 이미 렉터박사를 비롯해서 이미 여러 차례 봤지 않는가? 노래마저 왠지 재즈를 틀 것 같았는데 역시나Glenn Miller. 결국 박창이는 잔뜩 후까시 잡는데 그친 초급 킬러.

더욱 근본적으로, 최강을 추구하는 것이 애시당초 목표였다면 굳이 자본가를 죽일 필요마저 없었으니 킬러의 명분조차 없다. 안정적인 월급 – 분명 적치 않았을 터 – 받으면서 바람의 검심 사이토 하지메가 켄신 쫓듯이 박창이도 월급 받아가면서 남아도는 시간에 윤태구 쫓으면 될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본가를 죽인 이유는 자본가의 금고를 탈취하여 자신만의 대규모 보물 발굴단을 운영하려는 것이 목표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추후 진행 과정을 볼 때 그에게 원했던 것은 막대한 부가 최강이라는 타이틀이였기 때문에 – 그리고 우리는 이미 앞서서 박창이가 왜 최강 킬러에 한참 못 미치는지 짚었다 – 자본가 암살은 단지 킬러 박창이가 아니라 인간 박창이의 악랄함을 보여주기 위한 장면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그 외에도 처리하라고 일 맡겼다가 짜증났는지 쫓아가서 “항상 그놈의 주둥아리가 문제야, 힘줘!” 하면서 놈 입 찢어버리는 것은 대체 뭐하자는 플레인지 당퉤 알 수 없으며 최강자가 과연 자신인지 윤태구인지 확인 시켜주겠다며 지옥 끝까지 따라오라던 부하들마저 지옥 입구에서 미리 다 쏴죽여버리는 장면은 상상을 초월한다.

즉, 박창이가 어떠한 경과를 거치면서 바뀌는지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지도를 뺏어오라고 고용된 최강자 박창이 -> 윤태구 때문인지 지도 때문인지 지금 당장 알 수 없지만 일단 윤태구가 지도 먼저 낚아채는 바람에 마음 뒤틀린 박창이 ->  박창이가 노리는 것은 하찮은 월급이 아니라 지도 임을 밝히지만 실은 아이 훼이크였고 자신의 짖궃음을 증명하기 위해 초딩이 잠자리 날개 찢듯이 매국노 살해하는 창이 어린이 -> 만길이에게 이름 없이 접근하면 복사판 지도를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만길이를 처참하게 죽이면서 (왜 이리 못 죽여?) 슬슬 윤태구에 대한 복수심을 드러내는 박창이 -> 부하들에게 윤태구랑 다이 다이 뜨는 모습 보여주겠다며 전속력으로 달리는 말조차 뛰어 따라잡는 집념 하나만으로 윤태구 추격하다가 막상 입구 도착하자마자 부하 다 죽여버리는 (같은 팀마저 속는 펌프 훼이크 구사 -_-b) 박창이 미친놈 -> …

결국 윤태구 하나 붙잡으려고 온갖 수를 다 썼는데 윤태구는 왜 아무리 총알 맞혀도 안 죽는거야?  박창이가 왔다리 갔다리 하는 모습 보면서 혼돈스러워하는 나 자신이 가까스로 정신줄 부여잡으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왜 시발놈의 윤태구는 죽지 않는거야? 윤태구의 모자를 세번이나 연속으로 맞출 정도의 명사수임에도 불구하고 왜 총알을 이마에 박지 않고 팔 다리에 맞춘 것이며 왜 몸, 팔, 다리 도합 10군데 이상 맞은 윤태구가 피 좀 흘리면서 다리 저는 것 외에는 멀쩡하냐 말이지. 윤태구가 애초부터 불사의 몸이라면, 최강자를 가리자는 전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잖아. 결국 김지운 감독과 이병헌은 돈 – 최강자 – 악랄함 인과관계를 매끈하게 풀어내지 못한채 손가락 잘려서 복수심에 불탄 살인광 박창이 그리다만 작품이 되버렸다.

영화가 사건에 흐름에 따라서 시간이 진행 되었고 사건이 종료 됨에 따라서 상영을 마쳤다는 느낌이라기 보다는 영화 내내 이런 미로 안에서 헤매다가 길을 찾기보다 공간 초월적 esc 버튼 (상영시간 종료) 눌러서 내 자신을 그림 밖으로 가까스로 끄집어낸 느낌이다. 뭐, 그래도 이병헌 멋있는 것은 알아줘야해, 암암. 일단 남자 중에서 제일 멋진 미소 – 요즘 던킨 찍는 이선균을 부끄럽게 만드는 저 미소 – 잖아. 그리고 요즘은 연정훈 ㅅㅂㄴㅁ 이녀석 전생에 간디였느니 어쨌느니 하지만 불과 몇년전만 하더라도 공공의 적은 단연코 송혜교 사귀던 이병헌 아니였던가.

박도원(정우성)

박도원도 처음 모두가 돈을 위해서 뛰어들었다는 점에 있어서 마찬가지다. 하지만 “무엇을 쫓는 놈이 있지, 그러면 그 놈을 쫓는 또 다른 놈이 있지. 그러면서 쫓고 쫓기게 되는 게지. 인생은 원래 그런 게야” 라는 도원 말을 비추어건데 박창이의 집착 ‘최강자 다툼’의 변형판이 도원의 ‘쫓고 쫓기는 생태계’이다. 독립군에게 지도를 찾아달라고 청탁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지도 자체는 신경도 안 쓰고 오로지 창이 쫓아 총만 쏘는 것부터 시작해서 윤태구의 지도를 한번도 뺏을 생각 안했다는 점, GPS도 없던 시절에 어찌나 윤택구를 잘 포착하는지 사람 쫓아가는 집념 그 하나는 박수쳐줄만 하다. 하지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생태계 철학을 갖게끔 했는지, 집도 가난해 보이던데 왜 돈에 대한 욕심을 도중에 버렸는지, 독립군과의 관계는 어떠한지 (막판 만주 벌판 질주씬에서 유독 도원만 일본군을 죽인다), 대체 꿈은 뭔지 등등 전체적으로 밋밋하다. 박찬이에서 악랄함을 빼고, 돈에 대한 욕심 빼고, 동기조차 빼면 박도원정도 되는 듯 싶다. 즉, 그는 영화를 이끌어주지 못하고 열심히 뒤를 쫓거나 – 물론 날개 가루만으로도  눈부시도록 휘황찬란하긴 하다만 – 윤태구 옆에서 기럭지 빛 발하는 것에 그친다.  즉, 박도원만의 무언가가 없고 주로 못생긴 윤태구 학대하면서 웃기지 – 밧줄에 칭칭 감은채 도망가려는 윤태구한테 “뭐하냐” 건성 묻기, 총 건성 던져주기, “지그재그 뛰어갈까 아니면 일직선으로 뛰어갈까?” 물어보는 윤태구 건성 쳐다보기 등등 – 정우성 자체만으로 뭔가 즐거움을 뽑아내지 못한다는 점이 좀 아쉽다.  왜 어린 여자 후배들 웃길려고 꼭 못난 후배 꼽아서 갈굼 유머 사용하는 선배들있잖아 – 잘생겼지만 남자로서 딱히 이끌리지 않는 선배.  결국 정우성이 독자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는 동아줄/말 타면서 장총 핑그르~ 장전-  빵! 하는 모습 외에 없는데 이마저 17년전 터미네이터가 (오토바이 타면서) 한손으로 장전할 수 있음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그래도 정우성, 인간적으로 너무 잘생겼다. 예전부터 미국에 John Cusack과 Keanu Reeves가 있다면, 한국에는 장동건과 정우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여전하네. 칭찬은 나보다 이분들이 더 잘하니까 이분들에게 패스 오버하겠음. 개인적으로 – 내가 정우성같이 생길 수만 있다면, 생식기능 최소단위라는 7cm 좆이라도 굴하지 않고 살 자신 있어.

윤태구 (송강호)

처음부터 유일하게 일관성 있게 돈 쫓은 적역이다. 하지만 윤태구가 박창이의 집착을 이해해주지 못하고 끝까지 외면하는 바람에 둘 사이에 화끈한 액션 – 총질이 아닌 감정의 교환 – 이 발현되지 못했고 그래서 박창이가 갈피 못잡고 헤매는 주 원인이 되버렸다. 박창이가 만길이를 난도질하기 보다 납치했더라면 혹은, 윤태구가 보는 눈 앞에서 공개 처형했더라면 윤태구마저 박창이에게 복수를 외치는 – 박창이 또한 원하는 – 상황이 조성되지 않았을까 하면서 아쉬운 생각을 해봤다. 지금 생각해봐도 만길이의 죽음을 좀 더 활용(?)했어야 하는데 간과해버렸다. 이를 놓쳤기 때문에 결국 제목 그대로 잘생긴 착한/못된 놈과 웃긴 이상한 놈 – 3 인물 묘사 – 에 그쳐 버린 영화였다. 영화의 캐릭터간의 상호 작용이란 없이 그저 서로 갈 길 가다가 우연찮게 부딪쳤을 뿐이다. 박창이는 돈->최강자->악랄->돈->… 순환 고리에서 자멸, 윤태구는 좀도둑질하러 기차 탔다가 만난 끈질긴 인연 박찬이를 결국 떼어내어 자기 갈 길 가고 박도원은 휘황찬란하게 박찬이 쫓다가 (박찬이가 죽자) 이제는 윤태구 쫓기로 작정한다. 여기서 끝.

책이든 연극이든 바둑이든 축구이든 삶이든 사랑이든 원근법이든, 모든 행위-표현-점이 향하고자 하는 특이점이 있기 마련이다. 모든 단어는 전하고자 하는 개념을 보다 명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이고, 모든 풋볼 작전은 터치라인에 1인치라도 가까이 가기 위한 몸부림이며, 연인 사이의 다툼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보다 사랑으로 발전 시키기 위한 노력이며, 모든 연극내 갈등은 극작가의 메세지를 표면 위로 끌어내기 위한 도구이다. 전체적으로 꿰뚫는 전제도 없거늘, 갈등을 이끌어갈만한 캐릭터들이 아니였기 때문에 무너진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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